| 한국의 미술계를 향하여 미술비평은 진리 혹은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이 아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혹은 ‘이것은 예술성이 없다’라는 식의 판정을 내리는 일도 아니다. 현대미술이 변화하는 것처럼 비평은 비평 나름대로, 근대적 비평과 확연히 구별될 만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미술의 담론화에 따라 바뀌는 미술 내부의 지형도와 각 영역간의 역할 및 관계해석에 각각 커다란 역학적 변화가 불가피해지기 때문이다. 현대의 미술비평은 오늘의 미술이 지니고 있는 문제의식이 무엇이고,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일이자, 미술작품을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분석해야 할 것인지의 방법과 원리 자체를 연구하고, 나아가 그런 시스템을 통해 작품 혹은 미술현상이 오늘날의 미술 맥락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의 미술비평은 미술이라는 창작의 영역 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고, 그런 만큼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비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현대미술 문맥 속의 비평은 차라리 새롭게 마련된 창작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 만큼 비평을 통해 미술을 적극적으로 생산하는 일이자, 창작활동의 결정적인 카운터파트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현대미술 자체가 창작과 비평의 경계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겠다. 현대미술의 비평문화는 예술가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어 왔던 창작의 영역을 작가와 비평가 그리고 애호가들의 입장과 견해가 교차하며 소통되는 일종의 통로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미 널리 인식되어 있는 문제이지만, 예술에 있어서의 창작개념이 ‘창조’에서 무수한 ‘참조’의 연속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가 있다. 물론 미술비평이 비평가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은 오늘의 미술을 맞들어 쥐고 함께 고민하며, 그 쟁점과 이슈들을 비판적으로 교차검증하면서 미술문화를 이끌어 가는 동료이자 경쟁자들이다. 현대미술 자체가 창작과 비평의 경계에서 생산되고 문화의 영역에서 공유해 가는 공공의 가치인 것이다. 따라서 미술비평은 미술작품 자체를 위한 것이거나 미술작품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비평에 있어서 미술작품은 세잔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로 했던 사과처럼, 미술에 관한 논의를 위해 필요로 되는 모티브일 뿐이다. 미술작품에 관한 비평가의 분석과 연구 그리고 비판적 글쓰기는 작품의 해설이 아니라, 그 작품을 모티브로 한 비평가 자신의 창의적인 사고와 감성을 표출하는 엄연한 독립적 예술활동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술비평과 미술사의 논의와 연구범위도 미술작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미술비평과 미술사는 미술작품 그 자체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이라는 총체적인 가치와 문화의식에 관한 논의이자 연구인 것이며, 이것을 위해 미술작품이 필요로 되는 것일 뿐이다. 때문에 미술비평과 미술사는 미술작품 또는 예술가의 한계를 공유할 필요가 없으며, 나아가 이러한 비평과 미술사의 비판적 기능이 거꾸로 미술과 미술문화의 현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미술비평과 미술사가 훌륭한 예술작품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비평가와 미술사가는 비평과 미술사를 통해 미술의 가치를 성취해 가는 것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미술현장의 잘못된 가치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비평과 미술사의 직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비평문화가 직업적인 비평가의 전유물일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비평적 고민 역시 공유되어야 한다. 비평은 상호적이며 가혹하고 잔인할수록 더 아름답고, 현대미술은 그런 피비린내 나는 지독한 무한경쟁 속에서만 강한 설득력을 얻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메타비평이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미술비평이 오늘의 예술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 것이며, 예술이 우리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밝혀 가야 하고, 그 담론을 주도적으로 이끎으로써 미술의 적극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비평은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의 비평가들과 예술가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고독한 항해를 지속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변화해 온 미술이 어디쯤 놓여 있는지를 미술의 안팎에 해명해야 할 임무를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오늘의 비평가들에게는 고도의 가치분별력과 탁월한 감수성 그리고 그것을 담을 명쾌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요구되고, 집중력을 잃으면 한순간에 난해함에 빠져들 수 있는 문제들을 쉽고 명료하게 밝히고 전달할 수 있는 논리적 설득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전문적인 비평활동은 그런 역량을 갖지 않고서는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혹자들은 그런 식으로라면 이 땅에 예술가와 비평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르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매우 명료하다. 그것은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미술이 머릿수로 해결해 갈 수 있는 일이 아니듯, 비평 또한 비평가들이 먹고살며 행세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평의 윤리성은 곧 비평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론가 무리들이 아니라 올바른 비평적 가치를 세우고 그 직능의 힘을 보여 줄 진정한 비평적 정신인 것이다. * * * 한국미술계에도 적지 않은 미술평론가들이 있지만, 나는 그 많은 평론가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간혹 ‘미술평론가 아무개’라고 박은 명함을 내미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대부분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우스개 소리이지만, 신춘문예 당선한 다음 날 미술평론가라고 박힌 명함을 내미는 위인도 보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명함에까지 박아가지고 다니는 위인들도 보았다. 자기 PR시대라고는 하지만, 기여보다 과시가 먼저인 PR이 좋아 보일리가 없다. 물론 그 중에는 나 같은 위인은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탁월한 역량을 축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협소설처럼 그 실력을 드러낼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강호(?)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껏 한국의 미술평론가들이 써온 글들을 꽤 많이 읽어 오면서도, 비평적 강자들을 만나 본 경험이 없다. 오히려 미술과 비평에 관한 문제의식의 측면에서나 학문적․비평적 역량의 측면에서, 참으로 실망스럽다고 할만큼 유치하고 한심하기가 짝이 없는 글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의 글을 읽는 까닭은 악취미가 있어서도 아니고,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내겐 이것이 현실reality인 까닭이다. 현실은 모자라면 모자라는대로, 지나치면 지나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가끔 난감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지만, 그래서 어쩔 것인가? 이곳에서 태어나서 살아온 것처럼 이런 환경 속에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도 숙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속에서 스스로 제 할 일을 찾아서 맡고, 할 수 있는 한 모자라는 것을 보완하며 살아가는 것이 온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듣자니 소위 이론가들 중에는 작가가 이론연구 작업을 하며 비평집까지 내는 일을 아니꼬와 하는 사람들이 있다던데, ‘밥그릇 타령’을 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일들이 딱히 이론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닐 것이고, 그들이 잘해 왔으면 내가 할 필요도 없었을테니 말이다. 나는 직업적인 작가이기를 포기한지 오래인 사람이다. 그런 내가 직업적인 비평가가 되겠다고 이런 일을 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질 않겠는가? 나는 우리의 미술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것도 참으로 궃고 힘겨운 일을 말이다. 연구원들이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전전해가며 찾아낸, 라면박스 한 상자 가득되는 분량의 자료들을 번번이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 연구에 동참했던 이론가들에게 제공했다. 적지 않은 발제비도 주어가며 그들이 연구결과를 발표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학술행사를 열었다. 물론 그런 성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성심껏 임해준 분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제공된 자료와 동떨어진 뜬끔없는 소리들로 일관했다. 심지어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기획자가 “머리가 나쁘다”는 둥 “말귀를 못 알아 듣는다”는 둥, 맡겨놓은 물건 찾듯 “자료나 내어 놓으라”지를 않나,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고나서도 “학자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 일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냐”고 되려 호통을 치지 않나, 실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오만과 방자함을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걔는 내 말대로 움직이는 애니까 신경쓸 것 없다.”는 말까지 하고 다녔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겸손하면 밟고 지나가도 되는 인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이젠 오만하다고 할 것인가? 나는 내가 그런 일들을 하면서 왜 이론가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빈축을 사며 빈정거림을 당해야 했던 것인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본인들도 말했듯, 그것은 누구도 선뜻 나서서 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었고,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했던 일이다. 나와 연구원들은 그 일을 하는 내내 아침부터 밤 늦도록 일에 매달려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비록 지금 우리의 노동이 크지만, 앞으로 한국미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보게 될 편리가 그보다 더 클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 미술계가 얻게 될 성과가 그 편리보다 더 크다면, 우리가 고생하는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태하고 오만방자한 이론가들의 태도는 젊은 연구원들 보기에도 민망한 일이었고, 결코 존경받을 모습도 아니었다. 누가하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또 잘못된 점이 있으면 그것을 지적해야 하고, 나쁜 점이 있다면 그 점을 나무라면 될 일이다. 자화자찬 하는 것 같아 낯이 간지럽지만, 나는 내 삶의 귀중한 6년을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위해 바쳤고, 결과적으로 4천만원이 넘는 부채와 소비가 되지를 않아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책들을 남겼다. 다행히 예기치 못한 상을 받아 감당하기 벅찼던 부채를 탕감할 수 있었고, 이 점 늦었지만 심사위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지난 6년간은 작가로서의 본업에 충실할 수도 없었다. 상파울로 비엔날레를 위해 출국하기 전날 밤도 충무로 인쇄소 골목에서 밤을 새워야 했을만큼 일에 치어서 살았다. 나는 한국의 미술비평과 미술사의 진술 문제들이 우리 모두에게 그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는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를 진행하는 동안 느꼈던 문제들과 평론가들 및 미술사가들의 방자함에 자극을 받아 쓴 책이지만, 평론가들을 질타하고 비난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나의 비판은 오늘과 내일의 한국미술을 위한 일종의 고육지계苦肉之計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작고한 황현욱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산전수전 다 겪어 온’,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보아온 사람이다. 나이에 비해 험한 경험을 많이 했고, 늘 생계유지의 위협에 시달릴만큼 시련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만큼 나는 우리 미술계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고, 이 책의 출간으로 인한 결과를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 보다 훨씬 더 소상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책을 통해서도 이미 밝혔듯, 나는 비평가들을 동업자 내지는 동지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을 향해 칼을 뽑아 들기까지 20여년의 세월을 함께 동고동락했고, 그들의 생각과 역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싸움으로 치자면 승부는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는 이미 ‘적을 알고 나를 아는’ 사람이 던지는 승부수인 것이다. 모르긴해도 그들은 이 싸움을 감당해 낼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대표적인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의 실명과 구체적 진술들을 정면 비판하면서까지 논쟁을 제안했고, 일간지들도 조롱섞인 도전적인 기사를 내 보냈음에도, 정작 그 유명한 분들은 지금 유령처럼 존재감이 없다. 그리고 이 무덤가와도 같은 고요한 침묵이 그들의 전문성과 자존심 그리고 부도덕성을 명확하게 재인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할 수가 없는 것일 지도 모르며, 이는 그들의 비평적 생명이 이미 끝났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미술계는 가차없이 그들의 이름 앞에 ‘비평적 사망진단서’를 붙여야 한다. 그리고 비평적 세대교체를 가속화하여 이들의 한계를 넘어설 새로운 비평군을 구축해야만 한다. 고육지계苦肉之計라고 함은 이것이 나에게도 결코 내키지 않았던, 한국 미술계의 한솥밥을 먹고 살아오며 ‘미운 정 고운정’을 쌓아온 동료들과 선배들을 비평적으로 시해하고, 또 하나의 업業을 쌓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일로 인해 지금까지보다 더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고, 그토록 싫어했던 미술판의 정치논리와 어떤 식으로든 얽히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경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며, 평론가들과 반대자들의 보이지 않는 무차별적 보복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내가 십자가를 둘러맬 의사가 없는 사람이며, 따라서 이후의 삶이 내게도 괴로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남을 상처내고 자기도 다치는 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까? 한국의 미술계는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아직까지는 남의 일들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이 문제가 비판의 대상으로 지목한 8명의 평론가들과 미술사가들에게 한정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미술인들이 이 문제를 구경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평론가들만도 족히 수십명은 될 것이고, 미술사 전공자들과 큐레이터들까지 포함하면 족히 수백명은 될 것이며, 거기에 작가들과 애호가들 그리고 저널까지 더하면 무릇 그 수는 수 천에 달할 것이지만, 그들은 그저 이 상황을 구경하거나 은밀한 목소리로 공감을 전해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미술’과 ‘역사’의 범주 속에 속해 있는 존재들이며, 때문에 이 모든 상황들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미술이라는 가치를 생산하거나 공유하고 소비하는 존재들이므로, 이 상황이 당대의 ‘문화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침묵을 고집하는 한 역사는 이 시대를 다수의 절대적 패배로 기록할 것이다. 그저 발등에 떨어진 불 걱정이나 하고 사는 것이 고작인 사람들에게 ‘역사’의 기록은 아득히 먼 훗날의 일일 뿐이겠지만, 그들 모두는 늙고 병들어 무기력해진 상태에서, 무방비 상태로 그 훗날을 현재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최선의 방어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방어가 경우에 따라서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심각한 타격이 될 수도 있다. 특히 뭐든지 쉽게 잘 잊어 버리는 한국인들의 속성에 기대어 이 상황을 못 보고 못 들은 척,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듯 뻔뻔스럽게 바람잘 날만을 기다리면서, 보복을 위한 ‘꼼수’ 마련에 절치부심하고 있을 닳아빠진 위인들과, 영악한 척 객석에 편히 앉아서 돈키호테의 활약을 흥미롭게 관찰하며 대세를 관망하는 자들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바닥에서 닳아빠진 위인들의 전형적인 수법들을 잘 알고 있고, 그런만큼 그들을 실망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얼마전 모 일간지 기자가 빈정거리듯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평론가들이 충격을 받은 것 같지 않던데요? 멀쩡하게 무슨 일이 있냐는 듯… 전혀 달라진 것이 없어요. 펀치가 너무 약한 것 아니에요?” 사실 그 기자의 말은 싸움 구경꾼 수준의 전형적인 멘트였지만, 나는 이런 경우 그 말의 뜻보다 배후에 숨겨진 ‘의도’에 주목한다. 소위 ‘선수’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겠지만, ‘의도’가 포착된 이상 의미는 표면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겉보기와 속내가 아주 다른 경우들이 많아서, 섣부른 판단과 대응이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닳아빠진 사람들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훌륭하지만, 그래봤자 연기일 뿐이다. 당시 나는 그들을 ‘좀비’들에 비유했었다. 죽은 줄을 모르고 산 사람처럼 행동하며 돌아다니는 ‘좀비’들 말이다. 내가 아는 한 한국의 미술계에는 이런 ‘좀비’들이 꽤 있다. 어느 분야에나 소위 전문가의 세계에는 ‘진검승부’가 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한 칼에 죽고 사는 존재들이므로 그 세계에는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긴장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전문가들은 존중받을 이유가 있다. 한국 미술계의 ‘좀비’들은 비록 죽었지만, 죽어서도 자신이 결코 전문가일 수 없는 존재였음을 확인시키고 있는, 궁극적으로 영혼이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비평적으로 이미 죽은 존재들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다니고 있는 것일 뿐이다. 참고로 말하지만, ‘비평가들이여 내 칼을 받아라’는 문제의 일단만을 드러낸 일종의 서막일 뿐이다. 그들은 나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더 참혹한 일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행히 그들 모두는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왔고, 그런만큼 나름의 업보를 쌓아온 사람들이다. 또한 이 싸움과 승부에 불만을 가질 명분이 없을만큼 누릴 것을 다 누려온 사람들이다. 비록 그들의 사회적 성취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만큼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들의 역량에 비해서는 이미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그들을 넘어 내일을 향해 한발을 더 내어 딛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과연 그들을 ‘좀비’들로 만들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의 연구와 비판이 과거를 향해 있고, 그런만큼 현재적이거나 미래지향적이지 못하므로 한계가 있다고 지적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내가 선배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다니는 사람인 줄 알고 있는 위인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도를 밟기 위한 수순의 문제일 뿐이다. 누누이 강조해 왔듯, 나의 목적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있고, 그 현재는 다음 시대 즉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강조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썩은 세상에서 눈감고 귀를 막으며 살아왔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상황을 무기력하게 방치해 온 사람들이므로 공동의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 상황 속의 모든 일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다만 내일을 위한 준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 희생없이 대안을 모색해 갈 기회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스크랩)한국의 미술계를 향하여-오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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