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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나라로-한대수
<연예인과 우울증>
또 한 사람의 연예인이 아까운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TV에서 늘 얼굴을 보던 연예인의 자살기사는 마치 가족이나 친구처럼 느껴지는 까닭에, 얼굴모를 누군가의 기사보다 훨씬 그 충격이 크다.
<베르테르효과> 계속해서 매체를 통해 자살의 이유나 방법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도가 되고, 어떨땐 지나치리만치 선정적으로 소개되고 있어 기사를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후유증이 크다. 또 연예인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가진 청소년들이나 해당 연예인에 동질감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모방자살의 충동을 느끼게 해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베르테르효과'라고 하는 이런 현상은 작년 최진실씨의 자살이후 얼마간 우리 병원외래에서도 볼수 있었는데, 찾아오는 환자분들 가운데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호소하는 경우가 갑자기 늘었었고, 특히 최진실씨에게 많은 동질감을 느꼈던 주부들의 내원이 훨씬 늘었었다.
작년부터 연예인의 자살사건과 우울증을 앓아왔었다는 보도들을 연이어 볼 수 있었는데, 이번 장자연씨의 경우처럼 대부분 자살의 이면에는 우울증이 존재한다. 실제로 어떤 기사를 보면 연예인의 80%가 우울증을 경험해봤다고 한다. 일반적인 우울증의 유병률이 10-25%인데 비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돈도 많이 버는 선망의 직업인 연예인이 왜 훨씬 더 많이 우울증을 경험하는 것일까?
<연예인의 직업병?>
사람들이 연예인을 동경하는 이유는 돈과 명예가 따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연예인의 경우엔 대부분 성격상 감성이 풍부하고, 자기애적 성향(나르시즘)을 가진 경우가 많다. 자기애적 성향의 경우,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말 한마디에도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또한 악플과 인기의 하락등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겪어야할 일종의 직업병도 한층 더 큰 스트레스로 작용 한다
<화무십일홍>
꽃이 아무리 붉어도 열흘을 넘길 수 없다는 얘기처럼 인기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아무리 지금 별처럼 빛나는 스타도 나이를 먹는 걸 피할 수 없다. 게다가 그 과정을 모든 대중들이 지켜보게 된다. 연예인의 숙명이다. 젊었을 때부터 50대 60대까지 그 목표를 이뤄가는 다른 직업과 달리, 가수나 연기자의 경우 조금이라도 어릴 때 빨리 성공해야 된다는 생각에 쫓기게 된다. 오랫동안 탑스타로 국민배우의 자리에 있었던 최진실씨 같은 경우도 인터뷰에서 "인기가 제일 절정이었을 때도 언제 인기가 식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극도로 불안함과 스트레스를 느꼈었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던 것처럼 인기가 오를수록 그 끝에 대한 불안은 오히려 점점 더 커져간다. 대중의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고 누군가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어야 방송에 나올 수 있는 연예인에게, 인기하락에 대한 불안은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미지의 함정>
청순함과 섹시함 또는 사차원이미지까지 연예인들은 다양한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게 된다. 물론 실제의 모습과 다른 경우가 많지만, 대중은 실제의 모습도 그 이미지와 같기를 강요한다. 그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였을 때, 실망하고 비방하고 그로 인해 인기가 떨어지는 현실에 누구도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요구되는 이미지대로 살게 된다. 섹시한 연예인은 원해도 섹스하는 연예인은 원치 않는 다는 누군가의 얘기처럼.
인터넷의 발달로, 사인한번만 거절해도 바로 당일 포탈게시판에 000이 건방지다란 글이 올라오는 현실이다. 어느 경우에도 항상 완벽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늘 부담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사생활은 어디에?>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에게 연기할 수 있는 기회도 소중하지만, 카메라 뒤편에서 편안하게 다른 사람 흉을 볼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특히 유명인일수록 더욱 프라이버시는 적다. 정신과의사인 필자도 진료실 밖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나 다른 모임에서까지도 가운 입은 모습에 늘 진지한 얼굴로만 살아야한다면 과연 그 삶이 행복할까? 사람들은 누구나 사회에서 쓰는 가면을 벗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연예인은 누구를 만나도, 헤어져도 가족에게도 숨기고 싶은 얘기까지 신문이며 티브이에서 화제 거리가 된다.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기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24시간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살아야하는 연예인에게, 카메라도 악플도 존재하지 않는 편안한 쉼터가 아쉬운 현실이다.
<악플과 루머>
댓글은 인터넷시대의 새로운 문화이자, 자유로운 의견게시와 토론이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더 많다. 하지만 익명성과 군중심리라는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질투나 공격성, 관음증 등의 인간본성이 '악플'이라는 어두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대상은 선망과 시기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연예인을 향할 때 가 많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공격당하고 모함당하는 경우, 피해의식과 공격성, 분노가 마음속에서 자라게 된다. 그 분노와 공격성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는 연예인의 경우, 분노가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면 우울증상과 자살에 대한 충동으로 바뀌게 된다. 우울증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 때, 위험한 선택으로 가지 않게끔, 연예인들을 보호하고 적극적으로 도움 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기고: 마음과 마음 수지점 강성민 원장>
(끝)
출처 : 마음과마음정신과
본 콘텐츠는 해당기관의 홍보자료임을 밝혀드립니다.

27일 목매 숨진 배우 우승연. 1985년 5월 24일 ~ 2009년 4월 27일 사망 | |
ⓒ 마이데일리 |
한 인간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혹은 버리고) 영화나, 드라마, 음악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실존적 자아와 만들어진 이미지 사이의 괴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세상 모든 영광과 행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스타들의 심리가 불안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더욱이 스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일상이 공공의 일상이 되어 버린 공포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때 정체성을 잃어버린 스타의 불안은 가중될 수밖에 없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단지 먹고사는 문제의 고달픔이나 확실치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더욱 심각하게 연예인들을 위협한다.
문제는 이들 연예인들이 마음 놓고 이러한 심리적 상처를 치료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해외 스타들은 파파라치로 인한 사생활 노출과 극심한 언론공세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있어 스스럼없이 병력을 공개하거나 치료중이라는 사실을 밝히는데 반해 한국에서 인기절정의 스타가 정신과 상담이라도 한번 받았다는 것이 언론에 알려지면 그(혹은 그녀)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야말로 연예인들의 죽음을 조장하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않고 숨겨야 할 비밀이나 치부로 여기는 시선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꽃' 같은 연예인들의 애석한 죽음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데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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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들이 연예활동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분명히 일반인보다는 많을 게 확실하다... 인기하락에 대한 두려움,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생활, 많은 사람들의 관심... 등등...
그렇다고 자살을 택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배신이며, 남은 사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는 일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너무나 큰 짐을 함께 공감해 주지 못하고, 이해해 주지 못함에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ㅠㅠ 그립습니다...ㅠㅠ
1. 이은주
1980.11.16 ~ 2005.2.22 (26세 자살)
비교적 부주류 영화에 출연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가는 모습을 쭈욱 지켜보고 싶었는데... The Corr의 Only When I Sleep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 사진은 참 이은주 씨를 기억나게 한다...ㅠㅠ
2. 김광석
1964.1.22 ~ 1996.1.6 (33세 자살)
대학로에서 했던 콘서트에 가 보고 완전 반했는데... 지금도 노래방에서 김광석 노래만 불러요... 서른 즈음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거꾸로 가는 자전거... 일어나.. 등등...
3. 정다빈
1980.3.4 ~ 2007.2.10 (28세 자살)
옥탑방 고양이에서 보여준 귀여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4. 박용하
1977.8.12 ~ 2010.6.30 (34세 자살)
명품연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은은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참 좋아했었는데... "작전"이 그의 유작이 될 줄이야...
5. 김성재
1972.4.18 ~ 1995.11.20 (24세 사망)
듀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힙합 그룹... 이만한 듀오를 또 볼 수나 있을까..? 타살 의혹도 있긴 하네요... "여름 안에서"에서 이현도와 함께 췄던 춤은 참 기억에 남네요...
6. 장덕
1962.4.21 ~ 1990.2.4 (29세 자살)
한때 천재 싱어송라이터로 불렸던... 앳된 모습이 영원히 나의 기억에 남아 있어요... 오빠(장혁)의 빈자리가 컸을까..?
7. 최진실
1968.12.24 ~ 2008.10.2 (41세 자살)
내가 좋아 한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참 많은 영광과 시련을 보낸... 그래서 참 안쓰러운...
8. 최진영
1971.2.27 - 2010.3.29 (40세 자살)
누나(최진실)의 공백이 자신의 삶을 포기할 만큼 컸던 게지...
9. 안재환
1972.6.8 ~ 2008.9 (37세 자살)
참 선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무엇이 당신의 단추를 잘못 꿰게 만들었을까...?
10. 유니
1981.5.3 ~ 2007.1.21 (27세 자살)
인기를 향한 갈망은 실패에 대한 좌절감도 크게 만들겠지...
11. 서지원
1976.2.19 ~ 1996.1.1 (21세 자살)
당시, 미소년 가수로 인기를 끌고 너무나 큰 부담이 있었을까...?
12. 김다울
1989.5.31 ~ 2009.11.19 (21세 자살)
한국 모델로서는 참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냈는데, 어떤 부담감이 자살에 이르게 했을까...?
13. 곽지균
1954.11.10 ~ 2010.5.25 (57세 자살)
"겨울나그네", "젊은 날의 초상" 등 상당히 감성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셨는데...
14. 여재구
1970.9.22 ~ 2007.5.28 (38세 자살)
"단역배우", "재연배우"라는 수식어보다는 "영원한 연극배우"로 남아 있길...
15. 장자연
1980.1.25 ~ 2009.3.7 (30세 자살)
연예인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는 과정은 얼마나 치열할까...?
16. 김석균
1979.4.9 ~ 2009.1.17 (31세 자살)
유명배우가 가지는 스트레스 못지 않고, 무명배우로서의 서러움 또한 컸으리라...
17. 김지후
1985.7.11 ~ 2008.10.6 (24세 자살)
트랜스젠더와 함께 한국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커밍아웃"... 그렇다고, 악플과 비난으로 죽음으로 몰아 넣지는 말아야...
18. 이서현
1979.9.16 ~ 2008.12.1 (30세 자살)
5인조 보컬그룹인 "엠스트리트"의 멤버... 30세까지 한 길만을 달려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을 때의 좌절감...
19. 우승연
1983.5.24 ~ 2009.4.27 (27세 자살)
자신의 미니홈피에 "안녕"이라는 글만 남기고 가면...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요...?
20. 장채원 (본명 장정한)
1982.?.? ~ 2008.10.3 (27세 자살)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은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스트레스일거야...
21. 이창용
1971.?.? ~ 2009.3.12 (39세 자살)
경제적인 어려움이 목숨을 스스로 거둘 만큼 힘든 일이 되어 버린 세상...
22. 이혜린 (예명 : 유주)
1985.3.22 ~ 2010.10.23 (26세 자살)
레이싱 모델로 활동하고 "쎈" 그룹에서 가수 활동을 하다가 가수 활동이 부진하자 우울증에 자살...
23. 박서린 (본명 : 박혜상)
1981.5.12 ~ 2010.11.12 (30세 자살)
2005년 채널CGV 시트콤 "압구정 아리랑"에 출연한 여배우라고 하는데, 자택에서 자살... 역시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에 의한 것일까...?
SG 워너비 출신의 가수 채동하가 솔로로 활동함에 따른 부담감으로 자살... 연예인들이 가지는 부담감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인가...?
유명해지지 않음에 절망하고, 유명해질 희망이 없음에 자살한 것도 부족해서 1개월이 지나서야 자살한 사실이 밝혀지다니 연예인의 유명세에 대한 갈망은 확실히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 힘든 거 같다...
24. 채동하 (본명 : 최도식)
1981.6.23 ~ 2011.5.27 (31세 자살)
SG 워너비 출신의 가수 채동하가 솔로로 활동함에 따른 부담감으로 자살... 연예인들이 가지는 부담감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인가...?
25. 한채원 (본명 : 정재은)
1985 ~ 2011.8.25 (26세 자살)
유명해지지 않음에 절망하고, 유명해질 희망이 없음에 자살한 것도 부족해서 1개월이 지나서야 자살한 사실이 밝혀지다니 연예인의 유명세에 대한 갈망은 확실히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 힘든 거 같다...
26. 김추련 (본명 : 김성호)
1946 ~ 2011.11.8 (65세 자살)
또 한 분의 원로 배우께서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하였다... "겨울여자" 라는 영화로 내가 기억하는 배우인데, 배우의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달리 일반인이 모르는 숨은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거 같다...
27. 정아율 (본명 : 정아율)
1987 ~ 2012.6.12 (26세 자살)
나는 원래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 배우인데, 기사 상으로는 생활고에 시달려서 자살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제 26세이면 젊은 나이인데, 앞으로 펼쳐질 행복한 세상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28. 남윤정
1954 ~ 2012.8.1 (59세 자살)
기사를 보면 남편과 사별 이후,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서 자살했다고 한다.. 한 가정에서의 가장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거 같다... 참 편안한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하셨는데...
- 어쩌다 연예인 자살공화국이 됐나
- 엔터미디어
- 배국남
- 입력 2012.06.16 13:10
- 2012.06.16 13:20
수정
- 엔터미디어
- 연예인 자살 급증세,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 연예인 자살, 앞으로가 더 문제
[엔터미디어=배국남의 직격탄] 또 안타까운 죽음이 많은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한 무명 신인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KBS < tv소설-사랑아 사랑아 > 에 주인공 친구역으로 출연했던 정아율이 스물다섯 젊디 젊은 나이에 연기자로서 꿈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12일 서울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수많은 대중매체는 정아율의 자살원인을 우울증에서부터 돈문제, 생활고, 무명연예인의 현실과 고통 등을 꼽는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냈습니다.
정확한 자살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그녀가 페이스북에 남긴 "사막에 홀로 서 있는 기분. 열아홉 이후로 쭉 혼자 책임지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내 방에서 세상의 무게감이 너무 크게 느껴지고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공포가 밀려 온다"는 글만이 그녀의 심경을 어렴풋하게 엿보게 할 뿐입니다.
그동안 연예인의 자살은 외국의 특수한 사례로만 여겨질 만큼 우리와는 무관한 국내 연예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인식돼왔습니다. 대중문화 초창기였던 1926년 '사의 찬미'를 불러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성악가 윤심덕이 연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996년 가수 서지원(20)이 2집 앨범 발표를 앞두고 자택서 유서를 남긴 채 목숨을 끊었고 같은 해 영원한 가객, 김광석(31)이 자살해 대중과 연예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예인 자살은 우리사회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예외적 사건에 속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05년 2월 22일 스타 이은주(25)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라는 메모를 남기고 자살한 이후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이 계속 이어져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은주의 자살이후 가수 유니, 안재환 등 수많은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박용하 최진실 같은 톱스타에서부터 정다빈 최진영 같은 유명 연예인, 장자연을 비롯한 신인탤런트, 그리고 정아율, 유주, 한 채원, 박혜상 같은 무명 연예인 등 수많은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난 1월20일 전남 순천에서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꿈을 이룰 수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연예인 지망생인 고교생 김모양(18)이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연예인 지망생에서부터 톱스타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인 연예인의 자살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수많은 연예인들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도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연예인 지망 열기는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케이블TV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 슈퍼스타K3 > 에 참가 신청자만 197만명에 이르고 연예인이 아닌 연예인이 되기 위한 연습생을 선발하는 유명 기획사 오디션도 수만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은 이제 일상의 풍경이 됐습니다. 방송 연예과, 연극영화과, 실용음악과 등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대학 관련학과는 입학 경쟁률이 가장 높은 학과라는 표현은 이제 진부한 것으로 전락될 만큼 확고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연예인 지망생 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연예인 지망생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연예계와 대중문화 시장의 수요 인력에는 한계가 있는데도 방송사나 대학, 기획사 등은 꿈을 실현하라며 묻지마 연예인의 지망 열기를 고조시키는데 혈안이 돼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연예인들의 비극적인 자살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연예인 지망생의 꿈을 내세우며 이윤창출에 직결되는 연예인 지망 열기를 고조시킬 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방송사에서, 기획사에서, 길거리에서 화려한 연예인의 꿈을 광고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연예인 지망생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대중과 사회에 큰 영향을 주는 연예인의 자살사건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연예인 지망생 공화국이 이제 연예인 자살공화국으로 변화하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연예인의 자살 역시 자살률 높은 우리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한국의 2010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31.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위, 세계 2위이고 하루 42명이 자살하는 셈입니다. 끔찍한 대한민국의 현실이지요.
왜 예외적이고 이례적인 연예인의 자살이 이제는 일반적인 현상이 돼버린 걸까요. 왜 최근 들어 한국 연예인들의 자살이 줄을 잇는 걸까요. 연예인의 자살을 초래한 원인은 사업실패, 생활고, 가정불화 등 개인적인 신상의 문제에서부터 연예기획사의 실태, 연예계와 대중문화 산업적 메커니즘의 특성, 연예인의 직업적인 특수성, 연예인을 수요 하는 대중매체의 현황과 문제, 연예인을 소비하고 소구하는 수용자의 행태와 인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가수 지망생 김모양의 자살처럼 연예인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과 연예계 데뷔할 수 없다는 불안한 미래 등이 자살원인으로 작용을 하는 연예인 지망생들의 자살, 연예계에 데뷔했지만 출연기회나 무대에 설 기회조차 잡지 못하며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고통스러운 현실에 좌절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무명, 신인 연예인들, 그리고 성상납 강요, 폭행 등 연예계의 부조리와 병폐에 고통 받다 죽음을 선택한 장자연 같은 일부 연예인의 자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라는 메모에서 알 수 있듯 우울증의 고통에 시달렸던 이은주나 악성루머와 악플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은 톱스타 최진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예인들의 추정되는 자살원인은 매우 다양합니다. 물론 이는 추정 되는 자살 원인 일뿐 정확한 자살원인은 아닙니다.
연예인의 자살은 개인적인 문제 등이 원인일 수 있지만 대중문화 시장과 연예계 구조, 그리고 연예기획사 등 스타시스템의 문제 등 구조적인 부분과 연예계의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기 절정의 톱스타에서부터 단역, 무명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연예인은 영화,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음반 등 매작품의 흥행 성공여부에 따라 몸값과 인기도가 달라집니다. 이윤 창출에 올인 하고 있는 상당수 연예기획사가 연예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보다는 오로지 보다 많은 수입창출에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연예인의 소외감과 우울증 등 정신적, 육체적 질환으로 이어지면서 연예인 자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연예계의 특성상 스타급 연예인들은 인기 부침에 따른 위상과 활동, 대중의 시선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크고 이것이 극단적인 선택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화려한 꿈을 꾸며 연예인 지망생과 연예계 데뷔 신인 연예인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대중문화 시장의 한계로 인해 꿈을 펼칠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생활고와 불안한 미래에 대한 초조감을 겪으며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이들 중 일부가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연예인과 스타 같은 유명 인사들의 자살에는 유명성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유명도나 인기를 얻지 못해서 생긴 좌절, 대중의 인기와 관심 그리고 엄청난 수입창출로 해결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문제 등이 관련돼 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또한 장자연의 유서에서 밝혔듯 신인이나 연예인들에게 가해지는 성상납, 부당한 계약과 공정하지 못한 출연관행 등 연예계의 각종 병폐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에 대중매체와 연예기획사, 연예인에 의해 구축된 이미지와 실제 자연인으로서의 삶과의 간극과 괴리로 인한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 예술적 한계와 능력의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대중의 근거 없는 비난과 악성루머의 유포도 연예인의 자살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일거수 일투족이 대중과 대중매체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연예인들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이나 육체적 질환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이것이 종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충격적인 삶의 종지부를 찍는 비극적인 선택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연예인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의 표현이 일반화될 정도로 연예인 지망생에서부터 톱스타에 이르기까지 연예인의 자살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우리사회의 대책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예인 자살 사건이 일어날 때만 정부나 연예계 종사자나 일부 관련 단체들의 요란한 일회용 전시성 대책의 목소리만 난무합니다. 그뿐입니다. 실질적인 제도나 대책 실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현재에도 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연예인 자살이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지만 이것은 앞으로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최근 들어 연예계에 데뷔하는 연예인과 연예인 지망생들이 점점 어려져 초중고생 때 연예계에 데뷔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삶을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교육받거나 습득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가수나 연예인이 되기 위한 테크닉이나 스킬 숙지에 올인 하는 연예인 지망생들이 많습니다.
인간존재에 대한 튼실함이나 정신적인 건강함을 유지하며 어려움을 잘 극복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자리 잡기위한 소중한 교육이 생략된 채 오로지 연예인과 스타 되기에 올인 하며 살아온 어린 연예인들은 인기하락 등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연예계에 활동할 기회를 잡지 못하는 좌절을 맛 봤을 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현재보다 훨씬 많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연예인 자살은 앞으로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며 그래서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중문화전문기자 배국남 knbae@entermedia.co.kr
[사진=마이네임이즈 엔터테인먼트, MBC, 영화 < 오 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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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인 자살, 앞으로가 더 문제
[엔터미디어=배국남의 직격탄] 또 안타까운 죽음이 많은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한 무명 신인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KBS < tv소설-사랑아 사랑아 > 에 주인공 친구역으로 출연했던 정아율이 스물다섯 젊디 젊은 나이에 연기자로서 꿈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12일 서울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수많은 대중매체는 정아율의 자살원인을 우울증에서부터 돈문제, 생활고, 무명연예인의 현실과 고통 등을 꼽는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동안 연예인의 자살은 외국의 특수한 사례로만 여겨질 만큼 우리와는 무관한 국내 연예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인식돼왔습니다. 대중문화 초창기였던 1926년 '사의 찬미'를 불러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성악가 윤심덕이 연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996년 가수 서지원(20)이 2집 앨범 발표를 앞두고 자택서 유서를 남긴 채 목숨을 끊었고 같은 해 영원한 가객, 김광석(31)이 자살해 대중과 연예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예인 자살은 우리사회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예외적 사건에 속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05년 2월 22일 스타 이은주(25)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라는 메모를 남기고 자살한 이후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이 계속 이어져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은주의 자살이후 가수 유니, 안재환 등 수많은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박용하 최진실 같은 톱스타에서부터 정다빈 최진영 같은 유명 연예인, 장자연을 비롯한 신인탤런트, 그리고 정아율, 유주, 한 채원, 박혜상 같은 무명 연예인 등 수많은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난 1월20일 전남 순천에서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꿈을 이룰 수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연예인 지망생인 고교생 김모양(18)이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연예인 지망생에서부터 톱스타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인 연예인의 자살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수많은 연예인들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도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연예인 지망 열기는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케이블TV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 슈퍼스타K3 > 에 참가 신청자만 197만명에 이르고 연예인이 아닌 연예인이 되기 위한 연습생을 선발하는 유명 기획사 오디션도 수만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은 이제 일상의 풍경이 됐습니다. 방송 연예과, 연극영화과, 실용음악과 등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대학 관련학과는 입학 경쟁률이 가장 높은 학과라는 표현은 이제 진부한 것으로 전락될 만큼 확고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방송사에서, 기획사에서, 길거리에서 화려한 연예인의 꿈을 광고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연예인 지망생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대중과 사회에 큰 영향을 주는 연예인의 자살사건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연예인 지망생 공화국이 이제 연예인 자살공화국으로 변화하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연예인의 자살 역시 자살률 높은 우리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한국의 2010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31.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위, 세계 2위이고 하루 42명이 자살하는 셈입니다. 끔찍한 대한민국의 현실이지요.
왜 예외적이고 이례적인 연예인의 자살이 이제는 일반적인 현상이 돼버린 걸까요. 왜 최근 들어 한국 연예인들의 자살이 줄을 잇는 걸까요. 연예인의 자살을 초래한 원인은 사업실패, 생활고, 가정불화 등 개인적인 신상의 문제에서부터 연예기획사의 실태, 연예계와 대중문화 산업적 메커니즘의 특성, 연예인의 직업적인 특수성, 연예인을 수요 하는 대중매체의 현황과 문제, 연예인을 소비하고 소구하는 수용자의 행태와 인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가수 지망생 김모양의 자살처럼 연예인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과 연예계 데뷔할 수 없다는 불안한 미래 등이 자살원인으로 작용을 하는 연예인 지망생들의 자살, 연예계에 데뷔했지만 출연기회나 무대에 설 기회조차 잡지 못하며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고통스러운 현실에 좌절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무명, 신인 연예인들, 그리고 성상납 강요, 폭행 등 연예계의 부조리와 병폐에 고통 받다 죽음을 선택한 장자연 같은 일부 연예인의 자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라는 메모에서 알 수 있듯 우울증의 고통에 시달렸던 이은주나 악성루머와 악플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은 톱스타 최진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예인들의 추정되는 자살원인은 매우 다양합니다. 물론 이는 추정 되는 자살 원인 일뿐 정확한 자살원인은 아닙니다.

인기 절정의 톱스타에서부터 단역, 무명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연예인은 영화,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음반 등 매작품의 흥행 성공여부에 따라 몸값과 인기도가 달라집니다. 이윤 창출에 올인 하고 있는 상당수 연예기획사가 연예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보다는 오로지 보다 많은 수입창출에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연예인의 소외감과 우울증 등 정신적, 육체적 질환으로 이어지면서 연예인 자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연예계의 특성상 스타급 연예인들은 인기 부침에 따른 위상과 활동, 대중의 시선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크고 이것이 극단적인 선택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화려한 꿈을 꾸며 연예인 지망생과 연예계 데뷔 신인 연예인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대중문화 시장의 한계로 인해 꿈을 펼칠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생활고와 불안한 미래에 대한 초조감을 겪으며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이들 중 일부가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연예인과 스타 같은 유명 인사들의 자살에는 유명성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유명도나 인기를 얻지 못해서 생긴 좌절, 대중의 인기와 관심 그리고 엄청난 수입창출로 해결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문제 등이 관련돼 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또한 장자연의 유서에서 밝혔듯 신인이나 연예인들에게 가해지는 성상납, 부당한 계약과 공정하지 못한 출연관행 등 연예계의 각종 병폐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에 대중매체와 연예기획사, 연예인에 의해 구축된 이미지와 실제 자연인으로서의 삶과의 간극과 괴리로 인한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 예술적 한계와 능력의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대중의 근거 없는 비난과 악성루머의 유포도 연예인의 자살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연예인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의 표현이 일반화될 정도로 연예인 지망생에서부터 톱스타에 이르기까지 연예인의 자살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우리사회의 대책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예인 자살 사건이 일어날 때만 정부나 연예계 종사자나 일부 관련 단체들의 요란한 일회용 전시성 대책의 목소리만 난무합니다. 그뿐입니다. 실질적인 제도나 대책 실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현재에도 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연예인 자살이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지만 이것은 앞으로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최근 들어 연예계에 데뷔하는 연예인과 연예인 지망생들이 점점 어려져 초중고생 때 연예계에 데뷔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삶을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교육받거나 습득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가수나 연예인이 되기 위한 테크닉이나 스킬 숙지에 올인 하는 연예인 지망생들이 많습니다.
인간존재에 대한 튼실함이나 정신적인 건강함을 유지하며 어려움을 잘 극복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자리 잡기위한 소중한 교육이 생략된 채 오로지 연예인과 스타 되기에 올인 하며 살아온 어린 연예인들은 인기하락 등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연예계에 활동할 기회를 잡지 못하는 좌절을 맛 봤을 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현재보다 훨씬 많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연예인 자살은 앞으로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며 그래서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중문화전문기자 배국남 knbae@entermedia.co.kr
[사진=마이네임이즈 엔터테인먼트, MBC, 영화 < 오 수정 > ]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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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에서도 멋진 예술혼 불태우시길- |
Michael Jackson - They Don't Care About Us...
http://www.youtube.com/watch?v=97nAvTVeR6o&feature=player_embedded
알프레드 비네
보충 수업이 필요한 아이들을 선별해 내기 위해 지능 검사를 만들었던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
<출처 : Wikipedia>
삽살개와 마네키네코- 전래동화(개와고양이의 푸른구슬=견묘쟁주(犬猫爭珠))-연오랑 세오녀[延烏郎細烏女-장보고 [ 張寶高 ]
옛날옛적에 - 개와고양이의 푸른구슬 전래동화 우리 겨레 옛이야기
옛날옛적에 - 개와고양이의 푸른구슬
전래동화 우리 겨레 옛이야기
이 작품의 근원설화로는 동물보은담(動物報恩譚)·
견묘쟁주(犬猫爭珠) 견묘보주탈환(犬猫寶珠奪還)’ =)옛날옛적에 - 개와고양이의 푸른구슬
우리나라에서는 서울·개성 중심 중부지방의 설화.
이 설화는 부리아트족(바이칼호 동부 몽골족)에서 유래.
고려 중엽 이후 많은 몽골인·거란족이 이주, 귀화할 때
가지고 온 설화로 보이며 삼남지역은 그들의 귀화 정착지
고양이가 사람과 가깝게 지내게 된 연유를 풀이한 설화이다.
한 어부가 잉어로 변신한 용왕의 아들을 방생(放生)해 준 데 대한 보은(報恩)으로 여의보주(如意寶珠)를 얻었는데, 방물장수 할미의 꾐에 넘어가 빼앗겨 버린다. 이에 의분을 느낀 그 집의 개와 고양이가 탈환에 나서, 여의보주를 되찾아 돌아오다가 그만 개가 실수하여 강물에 떨어뜨렸는데, 고양이의 기지로 되찾게 되었으므로, 이에 보답하는 뜻에서 고양이를 그때부터 방 안에서 키우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유사한 설화가 부리아트족(Buriat 族:바이칼호 동쪽에 사는 몽골족)에게도 있는 것으로 보아, 몽골인과 거란족이 한국에 귀화할 때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 견묘보주탈환설화 | <doopedie두산백과>
............귀화 몽골인과 거란족.......................
천년 전 중국 동북 중원을 장악했던 요(遼)나라 거란(契丹)족
거란은 993년부터 세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던 강국이었다.
1018년 강감찬 장군이 적장 소배압을 상대로 귀주대첩을 거둔 것
거란은 그후 고려에 대한 야심을 접었는데
몽골이 세운 원(元)대 이후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 거란족이 한순간 사라지게 되었을까?
중국 서남쪽 윈난(雲南)성 일부 지역에 사는 다얼족
거란의 시조 '야율(耶律)'을 사당에 모신 사실이 확인.
거란족 후예들은 왜 이처럼 멀리 떨어져 살아남은 걸까?
거란족은 징기스칸 당시 몽골군 전위부대였기 때문.
요나라 멸망 뒤 자신을 공격했던 금(여진족 왕조)을 증오
거란족은 몽골 칭기즈칸과 손잡고 원 왕조 정복부대의 선봉
그 결과 거란족은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결국 중국 내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할 기회를 상실.
거란족 일부는 요나라 멸망뒤 현재 이란 지역으로 이동
'이슬람 세력으로 귀화했다는 설도 유력.'
고려 말 80년간 원나라 지배를 받았던 고려.
고려는 중국 송나라와 밀접한 무역 교역 국가.
거란과 중국 송나라 관계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
송나라는 문치주의 정책으로 힘이 미약했던 왕조
거란에게 조공을 해야만 명맥이 유지되었던 송나라.
1005년 매년 20만필의 비단과 10만냥 은을 거란에 조공
그 조건으로 거란과 송나라는 상호 평화조약을 맺게된다.
거란은 북경[유주-엣 지명]과 대동을 점령하는것으로 만족.
1005년 [제1차조약]거란과의 조약과 1042년[제2차조약]
송나라 조정은 거란에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조공.
1042년 거란과,송과의 관계는 형제 관계로 조약을 체결하고
매년 바치는 세제도[세금-조공물] 은 20만냥과 비단 30만필
송나라는 매년 막대한 조공을 거란에게 바쳐 국가 명맥 유지.
원나라 지배를 받던 고려에 대거 유입된 거란족.
몽골군 정예부대로 삼남지역 경계선에 주둔한듯.
그후 원나라가 역사에서 사라지자 한반도에 귀화.
지리산 이야기 - 아흔 일곱. ( 흥부전. 제비꽃. 오랑캐. 달오름 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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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적으로 보면
용궁과 용왕은 화산폭발?이 아니었을까
인물들은 비단장수, 방물장수는 중국
그 외 존재들 (개와 고양이)한국과 일본 거란 몽골~
june.
*연오랑 세오녀 [延烏郎細烏女]
신라 제8대 왕 아달라왕실록 ㅡ ③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와 그 배경에 숨겨진 비밀 신라왕조실록
『삼국유사』 기이편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설화가 전한다. 그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괄호 속에 있는 것은 편자 일연이 보충한 말이다).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년, 동해 해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닷가에 나가 미역을 따는데 갑자기 웬 바윗돌(혹은 고기)이 나타나서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보고 말하기를 “이는 비상한 인물이다.” 하고 건져올려 왕으로 삼았다( 『일본제기』를 보면 전이나 후나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자가 없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니 제대로 된 왕은 아니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나가서 찾아다니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고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이전처럼 바윗돌이 그녀를 태우고 갔다. 그것을 본 그 나라 사람들이 놀랍고 기이하여 왕에게 아뢰어 바쳤더니, 부부가 서로 만났고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의 빛이 없어지매, 일관이 아뢰되 “우리 나라에 내려와 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지금은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생겼습니다.”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오라고 했더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다. 이제 와서 어떻게 돌아갈 수 있으랴. 나의 왕비가 짠 세초(細稍, 생사로 얇게 짠 비단)가 있으니, 그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 하고 그 생초를 주었다.
사신이 신라로 돌아와 연오의 말을 전하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이전처럼 되었다.
그 생초비단을 어고(御庫)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고방을 귀비(貴妃, 세오를 지칭함) 고방이라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이라 하였으며, 또 도기야라고도 했다.
이 설화의 주인공 연오와 세오의 이름에는 공통적으로 까마귀 오(烏)자가 들어 있는데, 이름에 같은 글자가 공통으로 들어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이 부부이기 이전에 남매였음을 시사한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남매간에 결혼하는 일이 허다했고, 특히 특정한 직업이나 계층에서는 거의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삼국사기』나 『화랑세기』가 보여 주듯 신라 왕족들은 이복 남매 또는 삼촌, 사촌 간에 자유롭게 결혼하였다. 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일본도 남매간에 결혼하거나 사랑한 예들을 『일본서기』를 통해 숱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결혼 형태는 고려 시대까지 이어져, 고려 태조 왕건은 자기 손으로 자식끼리 결혼시키기도 했다.
혈족끼리의 결혼은 대개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거나, 자기 가문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고유한 기술이나 능력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연오와 세오의 결혼은 아마도 두 번째 경우, 즉 자기 가문에만 전해져 오는 고유한 능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오와 세오는 어떤 능력을 가진 집안 출신일까?
연오와 세오가 신라 땅을 떠난 뒤, 갑자기 태양과 달이 빛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일월의 빛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뜻이다.
태양과 달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양과 음의 대표 명사였다. 하지만 달은 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태양은 양의 정기로서 이것의 변화는 국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겼던 반면, 달은 음의 정기에 불과하기에 양에게 자극을 받아 변화가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삼국사기』에 일식에 관한 기록은 67건이나 있지만, 월식에 관한 기록은 단 한 건도 없다.
태양이 달에 가려 일시적으로 지구에 빛을 전달하지 못하는 이 일식 현상에 대해 적어도 조선 시대까지는 불길한 일을 예고하는 흉조로 인식됐다. 그래서 일식이 있을 때는 근신하고 반성하여 이 흉조가 실제적인 재앙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기원하였다.
연오와 세오가 신라 땅을 떠난 뒤 태양과 달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일식과 월식이 차례로 이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연오와 세오는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났을 때 행하는 행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까지 사람들은 자연의 이상현상을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해석했는데, 특히 일식은 가장 심각한 일이었다. 태양은 제왕을 상징하는데, 태양이 그 빛을 잃었다는 것은 제왕이 그 본래의 빛을 상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식이 일어나면 제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일식 현상을 빨리 타개하기 위해 왕은 백관을 이끌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스스로의 부덕을 고하였다.
일식 때 행하는 제사를 구식의(救食儀)라고 하는데, 이는 일식(日蝕)을 구제해 달라는 의식이다. 『고려사』 ‘예지’ 에는 구식의를 행할 떄 왕과 백관이 모두 소복을 입고 하늘에 잘못을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때에는 이미 천문 계산에 의하여 일식이 일어나는 원인과 그 날짜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구식의를 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일식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는 뜻이다.
일식(日蝕)의 ‘식(蝕)’ 은 ‘벌레가 먹어 치운다’ 는 뜻인데, 이때 ‘蝕’ 대신에 ‘食’ 을 쓰기도 한다. 즉, 고대인들에게 일식이라는 것은 ‘벌레가 해를 잡아먹는 것’ 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태양을 갉아먹는 이 벌레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있었다. 그 동물이 바로 까마귀였다. 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길조였으며 신령스런 동물이었다. 또 그 새까만 깃털 탓에 불에도 타지 않는 동물로 여겨졌다. 새까맣게 타 버린 숯은 더 이상 불에 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까마귀를 태양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타 죽지 않는 유일한 동물로 여겼던 셈이다. 따라서 태양을 갉아먹는 벌레들을 잡기 위해서는 태양 속으로 까마귀를 들여보내 벌레들을 모두 잡아먹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태양신화에서 태양의 정기를 세 발 달린 까마귀로 형상화해 놓은 것이나, 고구려 고분 벽화의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가 그려져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바로 태양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식이 일어나면 하늘로 까마귀를 날려 태양을 갉아먹는 벌레들을 잡아먹도록 했을 것이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로 일식 때에 까마귀를 하늘로 날리는 소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오랑이라는 이름을 풀이하면 ‘까마귀를 끌어들이는 남자’ 라는 뜻이다. 즉, 연오랑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의 소임을 나타내는 직업적인 명칭으로서, 일식이 일어나면 까마귀를 불러들여 잡은 뒤, 다시 태양을 향해 날아가도록 풀어 주는 소임을 맡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까마귀를 불러들이고 기르고 날리는 기술은 연오랑의 가문이 대대로 계승한 독특한 능력이었을 것이다. 그 기술이 다른 가문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남매끼리 결혼시켰을 것이다.
세오녀는 필시 생초비단과 관련이 있을 법하다. 신라에서 온 사신에게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으로 제사를 지내라고 한 것으로 봐도 이는 명백하다.
당시 까마귀를 날려 일식을 물리치는 제례 과정을 추측해 보면, 세오녀의 역할은 더욱 명백해진다. 일단 일식이 일어나면 왕과 백관들은 모두 상복을 입고 나와 하늘을 향해 엎드릴 것이다. 그러면 연오랑은 까마귀를 미리 잡아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으로 감싸 뒀다가 풀어 날리게 된다. 까마귀를 날린 다음에는 그 생초비단을 제단에 올려놓고 왕이 제주가 되어 제사를 지낸다.
그렇다면 세오녀는 바로 해를 갉아먹는 벌레를 퇴치하기 위해 하늘로 날려보내는 까마귀를 감싸는 생초비단 보자기를 짜는 일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달라왕 13년(166년) 정월 초하룻날 일식이 있었다. 다른 날도 아닌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일어났으니, 신라 전국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그로 인해 왕은 두려움에 떨고, 백성들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만약 이때 일어난 일식이 부분일식이 아닌 개기일식이었다면, 그 공포와 두려움의 강도는 한층 더했을 것이다.
왕과 백관들은 이 불길하고 어지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급히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아달라왕 4년에 이미 왜국으로 떠나고 없었다. 왜국으로 떠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왜인들이 은밀히 데려갔거나 납치한 듯하다. 만약 왜인들이 정중히 부탁하여 데려갔거나 연오랑 스스로 망명했다면 필시 세오녀를 대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 세오녀를 그대로 두고 혼자 왜국으로 갔다. 이는 스스로 원해서 떠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당시 일식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신라에 일식을 물리치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히 사람을 파견하여 납치해 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비록 강제적으로 붙잡아가긴 했으나, 연오랑에 대한 왜국의 대접은 매우 극진했다. 땅을 떼 주고, 노비를 붙여 주고, 작은 지역의 호족으로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신라에서 연오랑이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때는 오직 일식이 있을 때뿐이었다. 신라에서는 왜국에서와 같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을 리가 없다. 기껏해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식량과 부쳐 먹을 만한 밭뙈기 한두 마지기 받은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왜국의 대접은 융숭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아내 세오녀도 불러들인 것이다.
하긴 일식을 물리치는 일은 연오랑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 없이는 구식의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국 왕은 다시 신라에 사람을 보내 세오녀도 데려왔다. 연오랑이 왜국에 있음을 알려 주고, 그 증거로 그의 신발을 보여 주며 세오녀에게 함께 동행할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는 왜국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이 왜국으로 떠난 지 9년 뒤에 아달라왕에게는 너무나 불길한 일식이 발생할 것이라는 일관의 보고가 올라온다. 다른 날도 아닌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닥칠 것이라는 보고였다. 만약 아무런 대책 없이 정월 초하루에 일식을 맞을 경우 민심은 크게 흔들릴 것이고, 아달라왕의 자리도 위태로워질 게 뻔했다.
더구나 당시 아달라왕은 크나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일식이 있기 두 달여 전인 165년 10월에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했던 것이다. 비록 실패한 역모였지만 길선은 백제로 달아났고, 아달라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한 터였다. 이런 경황 중에 일식이, 그것도 정월 초하룻날 일어난다면, 그 일을 빌미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 백제와 대치하고 있던 신라 군대의 사기마저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위기를 느낀 아달라왕은 급히 왜국에 사신을 파견해 연오랑과 세오녀를 환국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왜국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난감해진 아달라왕의 사신은 환국이 불가능하다면 일식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애걸했다. 연오랑은 자기 아내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을 내주며 그것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라고 했다.
일식이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래도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으로서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정월 초하루에 일어난 일식이기에 그 공포와 두려움은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달라왕은 어떻게 해서든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래서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 보자기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왕실과 백관 그리고 백성들의 불안을 해소시켰던 것이다.
아달라왕은 재위 후반기 10년 동안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그의 왕비 내례부인이 석벌휴의 아들 이매와 정을 통하고, 벌휴 세력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아달라왕과 벌휴의 싸움은 그후 1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결국 아달라왕은 반란군에 의해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다. 어쩌면 연오랑과 세오녀의 망명은 이러한 아달라왕의 불행에 하나의 불씨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아달라왕 시대의 세계 약사
아달라왕 시대 중국은 후한 말기에 해당되는 시기로 환관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정치 기강이 무너져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황건적이 세력을 형성한다. 또한 장각 형제가 백성을 선동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조조와 황보숭 등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이때, 로마에서는 페스트가 유행하여 이를 계기로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한층 심화된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자성록』과 파우사니아스의 『그리스 안내기』가 쓰인 시기이기도 하다.
▣ 출처 :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웅진지식하우스), 박영규 지음.
연오랑 세오녀
일본왕가의 혈통변화.1 엮인글 http://blog.naver.com/zeburm/20108606019
고래
<스크랩자료임>
장보고 [ 張寶高 ] 설화
신라의 무장.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려고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40년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출처] 장보고 | 두산백과
장보고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신라명신(新羅明神)으로 중국에서는 '中國第一海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후백제(後百濟)의 해적(海賊)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우리말로는 骨大島라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공(良貝公)은 이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다"고 했다. 이에 그곳 신령스러운 연못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치솟는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자신은 서해약(西海若: 용왕, 필자 주)이라고 소개하면서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에 남겨 두면 순풍(順風)을 얻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 - <삼국유사> 진성여왕과 거타지(居타知)편 -
여기에서 골대도(骨大島)라는 말은 뼈가 큰 동물과 관련된 섬이라는 의미인데, 분명 고래 섬의 의미로 보인다. 뼈가 크다는 것은 고래토템시대에서 유래한 말로서 나중에 '기골이 장대하다'는 등의 신령한 토템지도자들에게도 사용된 뼈는 고래뼈에서 기원한 위엄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骨大島는 말하자면 '고래섬'인 것이다.
일부에서 골대도를 오늘날 백령도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骨大島(鵠島)는 "후백제의 해적이 나타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남 완도 인근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거타지 신화 자체가 완도 청해진 일대에서 해적을 정벌한 장보고 스토리를 배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남 진도(津島) 서남쪽 세방낙조전망대 바로 앞에 있는 곡도이거나 장보고가 청해진을 건설한 완도 자체를 의미한 것일 수 있다.
거타지 신화의 주무대인 곡도(골대도)가 어디인지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진주목'조에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이니 달리 거타(居陁)라고도 한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을 비롯하여 <삼국사기> 지리지 강주(康州)조에서 "거창군은 본래 거열군인데(혹은 거타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에 개명했다"라는 내용으로 경남 거창군을 곡도(골대도)로 보는 것도 무리다. 왜냐면 거타지는 사람 이름이고 섬 이름이 곡도(골대도)이기 때문이다.
곡도 즉 골대도는 고래섬이라는 것은 고래는 동해안을 중심으로 서해안보다 남해안이 고래가 상대적으로 더 출몰해 왔다. 따라서 거타지 신화의 골대도는 완도 인근의 섬으로 보아야 한다.
골대도의 연못에서 늙은 여우를 활로 쏘아죽이는 거타지 신화는 작제건 신화에서 '바위 섬'으로 표현되었다.
작제건 신화에서 작제건이 그의 아버지를 찾아 바다를 항해할 때 혼자 바위 섬에 남아 용왕의 요청으로 활로 바다 괴물을 쏘아 죽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거타지 신화와 같은 구조를 가진다. 이에 대해서는 <코리안 신대륙발견: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고래사냥 '작살잡이'에서 다루었다.
당나라로 가는 사신단 중에 혼자 골대도(骨大島 '고래섬')에 남아 "해적이 출몰하는 섬에 남아 있다"는 것은 장보고가 청해(완도)에 남아 해적을 무찌르는 것과 일치한다. 거타지(居타知)도 활 잘 쏘는 '활보(弓巴)'였다고 할 때 장보고의 본명이 어쩌면 거타지(居타知)였을 수도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삼국유사> 거타지 신화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거타지는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나의 장기(長技)이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사라지고 거타지는 숨어서 기다렸다 (중략)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를 한다. "공의 은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말하고는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모시고 당나라로 가는 신라 사신(使臣)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하여 거타지가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중략)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오자 거타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 - <삼국유사> 진성여왕과 거타지(居타知)편-
거타지가 당나라를 다녀오는 스토리 구조와 장보고가 당나라로 가서 적산원에서 다시 신라로 돌아오는 과정에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거타지와 장보고 모두 활의 명수이고 해적을 무찌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거타지 신화는 장보고 이야기를 거타지 신화 형식을 빌려 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작제건 신화와 구조적으로 일치하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 신화 또한 장보고 이야기를 그대로 신화로 만들어 왕건의 조상이 장보고와 같은 항해자 영웅 집안임을 인위적으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장보고가 이들 두 신화의 실제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작제건 신화에서 용왕('西海若'이라 표현했다)과 늙은 여우(중으로 변신한)의 대결을 청룡과 흑룡의 대결로 표현했다. 활 잘 쏘는 작제건이 청룡(용왕)의 요청으로 흑룡을 쏘아죽이는 스토리는 그대로 작제건 스토리 구조를 가진다.
거타지가 당나라로 가는 사신단 수행원으로서 중간에 골대도 섬에 남게 되는 것과 같이 작제건 또한 당나라로 가는 도중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바위 섬에 혼자 남게 된다는 것과 일치된다.
풍랑이 심하여 작제건이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그곳이 용왕을 만나는 바위섬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섬은 거타지 신화에서도 용왕을 만나는 곡도(골대도)이다. 이들 두 인물은 완도에서 해적을 무찌르고 '해신'이 된 장보고 생애를 신화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신화는 권력에 밀려난 사람들이 무속적으로 전승되는 수가 많다.
고려말 최영장군의 무속에서 신화화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듯이 장보고는 신라왕실에서 암살당한 인물이었다는 것에서 이루지 못한 무속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다 활동에서 활의 명수 장보고는 고려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신라시대 인물) 신화와 <삼국유사>의 거타지 신화에서 보여주는 해상에서 활을 잘 쏜 신화의 주인공들의 실재인물이 되는 것이다.
장보고가 당나라 신라방 적산원에서 돌아와 신라 조정에서 청해(淸海)의 해적 소탕을 위한 군사를 요청하는데 그 과정이 거타지 신화와 일치한다.
장보고는 당나라로 가는 길목에 해적들이 출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 1만 군사로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그 섬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가 된 장보고는 해적들을 완전 소탕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그대로 거타지 신화와 일치된다.
거타지(居陀知) 신화는 ≪삼국유사≫ 권2 기이편(紀異篇) 진성여왕(眞聖女王)과 거타지(居타知)조에서 거타지 또한 당나라로 가는 길목에서 해적을 소탕하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장보고가 해적을 소탕한 청해(淸海) 가리포(加利浦)는 거타지가 해적을 소탕한 골대도(骨大島) 또는 곡도(鵠島)에 비견된다.
장보고는 신라 희강왕(837년)의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 나중에 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신무왕(神武王)에 옹림하고 자신은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여기에서 장보고는 민애왕을 죽이고 신문왕을 옹위하는데 가담한다는 스토리 구조는 거타지 신화에서 용왕을 죽이려는 중으로 변신한 늙은 여우를 활로 쏘아 죽여 용왕과 그 가족을 살리는 신화 구조와 유사하다. 거타지 신화는 용왕편에 서고 중과 늙은 여우를 병립시켜 불교와는 거리를 두는 면을 보여주고 있다.
장보고를 신라명신과 일체화시키는 일본인들의 신라신을 모신 신궁 신사들의 전통을 볼 때 장보고 또한 불교적인 인물이라기보다 신라의 해신신앙과 연관한 풍류신선도 중심의 인물이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타지는 자칫 그 당시의 불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수 있었던 용왕가족을 살려내는 인물로 묘사된 것은 고래신 숭배에서 해신신앙의 공통점을 거타지와 장보고에게서 볼 수 있다.
거타지가 용왕의 딸을 얻는 것처럼 장보고의 딸이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혼담이 오간다. 신무왕(骨大島)의 아들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장보고는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서 845년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궁중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혼담이 성사되지 못했다.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로 들이려다 성사되지 못한 것은 신라의 고래토템과 용왕숭배가 결국 좌절된 것을 의미하지만, 나중에 '해신'을 추앙된 장보고는 '용왕'의 위치를 계승하는 상징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작제건 신화에서 용왕을 살려 그 딸을 데리고 나온다는 것은 작제건이 용왕의 가문을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의 원형이 장보고의 삶에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장보고가 무속적으로 해신이 된 것에서 장보고가 죽어도 일본의 당나라 유학승들은 전통 신라명신에 화신된 장보고를 신라명신으로 숭배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래토템숭배시대는 '용왕=장보고'의 죽음과 함께 불교문화에 의하여 쇠퇴해갔다. 거타지 신화에서는 용왕을 죽이려 한 불교적인 요괴를 "중으로 변신한 늙은 여우"라고 표현하고 있다.
거타지 신화에서 용왕을 죽이려는 늙은 여우(중으로 둔갑한)를 죽여 용왕가족을 살렸을 때 용왕이 그의 딸을 꽃가지로 둔갑시켜 거타지의 가슴에 품게 하여 당나라 사신단으로 갔다 와서 다시 꽃가지를 여인으로 둔갑시켜 함께 살게 했다. 용왕의 후계자로서 거타지에게 꽃을 바친다는 의미가 거타지 신화 속에 숨어 있다.
이것은 거타지가 용왕을 계승했다는 의미가 되어 장보고가 해신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 수로부인편에 나오는 '소 모는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는 내용과 여기 용왕이 거타지에게 꽃을 가슴에 품게 하는 것과 구도가 일치한다. 다시 <삼국유사> 어산불영편에서는 "'소 모는 노인'이 용이 되어 부처에게 꽃을 사서 바쳤다"고 하여 결국 중으로 둔갑했다는 '늙은 여우'에게 용왕(소 모는 노인)은 굴복되었다는 것으로 묘사하여 불교문화가 최종적으로 신라 전통의 '神國의 道'를 장악 흡수했다는 것으로 묘사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新羅神'으로 숭배되어 온 신라인 장보고
고려시조 신화에 장보고 '해신' 신화가 작제건신화로 나타나는 것은 그저 단순한 이미지 차용이 아니라 험난한 바다 항해에서 자연적으로 위대한 바다의 영웅을 신으로 받든 그 시대의 항해 신앙을 바탕한 것이며, 특히 억울하게 죽은 영웅의 후속적인 신격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신룡이 되었다는 문무왕처럼 장보고는 '해신이 되었다'고 믿어졌으며 신라신으로 해상무역인들에게 특히 받들어져 중국 산동반도 적산원 안내문에도 나오듯이 장보고는 동아시아에서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중동까지 그의 이름은 해신 숭배와 함께 뻗어간 것이다.
신라신이 바다를 통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해신이며 태양신으로 숭배된 것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비롯하여 스미요시 신에서도 볼 수 있는 바다를 건너온 신라신의 전통은 일본에서 이어져 왔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에서도 동신(東神)의 이름으로 숭상되고 있었음을 김부식이 송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의 기록으로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장보고의 적산선원이 있던 산동반도 석도(石岛)의 적산(赤山)은 을 중국인들이 “东方神山(동방신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대로 "东方神山=东神"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라의 태양신인 선도성모의 다른 명칭인 동신(东神)성모를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장보고가 해신으로 받들어진 것은 고래들의 왕인 범고래 해신으로 숭상된 것이며 동시에 신라시대의 산신인 범과 해신인 범고래의 신으로 숭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장보고의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樊川文集>과 그 책을 인용한 <新唐書> 및 <三國史記>는 모두 장보고를 '新羅人'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가 당나라 출생은 아니라는 것은 장보고와 그의 동료 정년(鄭年)이 신라(新羅)로 돌아간 것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 것을 보면 신라태생임이 틀림없다.
신라시대 항해자들이 가는 곳마다 장보고의 영향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서해안에서도 해신으로서 장보고의 신앙적인 영향은 찾을 수가 있다. 장보고를 완도(莞島) 출생이라거나 변산반도 출생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배경을 인지하지 못하는 오류이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것만으로 장보고가 청해진 출생으로 보려는 것도 억지로 보인다. 청해진이 완도에 설치된 것은 서라벌에서 당나라로 가는 길목인 완도 지역에 해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신라 조정에 의하여 장보고를 그곳에 배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거타지 신화에서 잘 대변하고 있다.
신라인 장보고는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지금도 해신으로서 숭상되는 것으로 알져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중국제일해신(中国第一海神)'으로 추앙하고 있을 정도다.
산동반도 석도(石岛)의 적산(赤山)은 “东方神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장보고가 한민족의 영웅이라고 중국인들은 자랑스럽게 평가하고 있다. 중국에서 장보고가 세운 산동반도 적산법화원(赤山法华院)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홍보하고 있다.
*사진의 왼쪽이 적산선원 즉 츠산찬위안(赤山禪院)이고, 오른쪽이 적산법화원 즉 츠산파화위안(赤山法華院)이다
당나라 목종 4년(824년) 한민족 영웅인 해상무역가 장보고는 이곳(적산)에 적산법화원(赤山法华院)을 세웠다. 나중에 일본 고승 엔닌법사가 세번이나 적산을 찾았는데 2년 9개월간 이곳에서 묵었다. 그의 저서《入唐求法巡礼行记》는 당나라 때 현장(玄奘) 법사의 손오공으로 유명한《大唐西域记》와 원나라 때의 이탈리아인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대여행기로 유명하다. 일본 사절을 따라 당나라에 유학을 와서 불교의 명승지를 돌아본 엔닌(圆仁)이 이곳에 찾아와 장보고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산원은 한중일 삼국 국민의 우호왕래의 역사적 현장이 되고 있다.
唐穆宗四年(公元八二四年),韩民族英雄、海上贸易家张保皋在此建“赤山法华院”,后日本高僧圆仁法师曾三赴赤山,客居此院两年九个月,著写的被誉为东方三大旅行记之一的《入唐求法巡礼行记》(日本圆仁所写的《入唐求法巡礼行记》和唐代玄奘写的《大唐西域记》、元朝意大利人马可·波罗写的《马可·波罗行记》被人们誉为“东方三大旅行记”),遂使此地成为佛教胜地和中韩日三国人民友好往来的历史见证地。
당나라때의 불교사찰인 웨이하이 지역의 적산법화원(赤山法华院)은 세계유일의 불교문화와 현대과학기술의 완전한 결합을 이루는 관음보살계의 태양신(大明圣境)인 '중국제일해신상 - 적산명신(中国第一海神像--赤山明神)이 있다. 이것은 동쪽나라들과 교류해온 역사변천의 일과 중국북방의 어민들의 민속박물관인 '영성박물관(荣成民俗馆)'으로서 한국민족영웅(韩国民族英雄)을 기술하고 해상무역인 장보고의 위대한 생애와 그 기념관의 의미를 가진다.
威海最古老的唐代佛教寺庙--赤山法华院;世界唯一的佛教文化与现代科技完美结合的观音动感音乐喷泉--极乐菩萨界;中国第一海神像--赤山明神(大明圣境);反映胶东历史变迁事象与中国北方渔业民俗的博物馆--荣成民俗馆;记述韩国民族英雄、海上贸易家张保皋生平壮举的张保皋传记馆
여기에서 중국인들은 한국민족영웅(韩国民族英雄)인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赤山法华院)은 장보고를 신라명신을 모신 것으로 인정하고 그 신상을 세워 '중국제일해신상-적산명신상(中国第一海神像--赤山明神)'으로 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赤山明神'이라 함은 산동반도에 있는 장보고의 적산선원의 적산(赤山)에 있는 新羅明神(신라명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위치를 앞에 표시하여 신라명신을 표기하는 말이다. 일본에서도 신라명신을 그대로 쓰는 곳과 장보고의 적산원 명신을 모시는 의미로 '赤山明神'이라고 하거나 그 지방의 이름을 넣어 'ㅇㅇ明神'으로 표현한다.
중국은 당나라의 권위를 세우고, 한국은 신라의 장보고의 위대함을, 일본은 엔닌의 여행기를 자랑하는 그 중심이 산동반도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으로 홍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도 그렇게 신라명신상을 '중국제일해신상(中国第一海神像)'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일본인들 또한 장보고의 화신으로서 신라명신을 숭배하는 일본의 적산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赤山明神像과 赤山明神的传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적산명신을 소개하고 있다. (*아래의 번역은 http://www.furuze.com/a/shidaofengjing/2010/1102/109.html 웹사이트의 홍보 내용을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적산명신상(赤山明神像)은 세계 최대의 청동신상이며 높이 58.8m로 '중국제일해신상-적산명신(中国第一海神)'으로 배산임수의 위치에서 사방을 보우하고 있다.석도만(石岛湾) 서쪽 산에 위치하여 우리 지방의 석도봉황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인 적산(赤山) 위에 거석상을 세운 것이다."
赤山明神像是世界最大的锻铜神像、高58.8米,也是中国第一海神像赤山明神,踞山面海,护佑四方。在石岛湾西山,离我们的小区 石岛凤凰湖 不远处的赤山上有几块巨石.
이곳 동리의 전설에 따르면 적산신(赤山神)이라고 하는 산신이 있었다. 전설에 전해오는 적산신은 신통함이 대단하여 사람들이 몰려와 해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멀리로부터 사람들이 찾아와 향을 올리고 참배를 하여 재난을 막고 병치유와 복과 평안을 빌었다.
传说在洞里居住着一个山神,叫做赤山神。传说赤山神神通广大,得到人们的崇信,逢年过节,周围几十里的人都来烧香跪拜,祈求消灾祛病,赐福保平安。
적산신(赤山神)은 명신(明神)이라고도 하는데 명신은 본래 적산 홍문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적산명신은 사해를 보호하는 신으로 그 법력이 무한하여 향토를 수호하고 복을 크게 내리며 공덕이 무량하여 황하북방을 보우하는 신이었다.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할 때(BC 219), 동쪽으로 순회하면서 장생불노약을 구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큰 병을 얻어 이곳 명신明神)에게 기원하여 낫았다.
赤山神,也叫明神,相传明神本相出于赤山红门洞。赤山明神威镇四海,法力无边,守护乡土,福佑大千,功德无量,乃华夏北方庇佑之神。始皇并六国,于嬴政二十八年(前二一九年)东巡成山,以求长生不老之药。途大病,李斯遽祈明神,旋无恙。
여기에서 중국인들은 적산명신이 장보고에 의하여 신라명신이 된 것에 대하여 중국 배경의 토속신을 가미시키고 싶어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웅신으로서 장보고가 신라명신을 받들던 신라신이 적산명신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아래에 이어 설명하고 있다.
당나라 문종 3년(838년) 일본의 천태종 자각대사(慈觉大师)인 엔닌(圆仁)이 당나라로 오는 사절단을 따라 유학와서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적산원에 참배하고 머물렀다. 엔닌이 귀국하던 도중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명신(明神)이 현신하여 위험에서 건져주게 되어서 그때 가지고 가던 경전 수백 권을 보존할 수 있게 했다.
唐文宗开成三年(八三八年),东瀛天台宗三世座主圆仁(慈觉大师)随遣唐使赴唐求法数载,曾三赴赤山拜谒。归途中,于沧海屡遭劫难,幸明神显灵,方化险为夷,且保全经典数百卷。
엔닌은 귀국하여 적산명신을 일본의 천태종의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어 그후 그곳의 안혜병(安惠秉)이 그 유지를 받들어 교토에 절을 세워 그 이름을 '적산선원(赤山禅院)'이라 칭했다.그후 적산명신(赤山明神)은 점차 일본에서 전국적으로 숭배하게 되었으며, 그 신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등지에도 퍼져갔다. 지금 일본과 한국 등의 사원에는 적산명신을 받들어 모시고 있으며 세상의 중생들을 위하여 복을 비는 신으로 모시고 있다.
圆仁归国,遂以赤山明神为天台宗庇佑之神供奉,其后同门安惠秉承其遗愿,于京都修一寺院,名之曰:“赤山禅院”。而后,赤山明神渐为东瀛等国所崇拜,乃至波斯、大食等区域。至今,日本、韩国等寺院仍多供奉赤山明神,以福佑天下,普渡苍生。
당 고종 5년, 당나라 조정에서 신라를 도와 같은 한국 역사의 고구려와 백제를 무찔러 삼국통일을 완성했는데 이때부터 당나라와 신라는 크게 우호 관계를 긴밀하게 가졌다. 그로 인하여 수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를 방문하여 당나라의 문화와 관제 및 생활을 공부하기 위하여 힘써 군사를 후원하고 배와 노비 등이 장기적으로 중국에 거주하게 되어 동남쪽 연안 바다와 대운해(大运海) 연안지역에 분포하여 거주하게 되었다.
唐高宗显庆五年,唐政府帮助新罗,也就是现在的韩国打败高丽和百济,统一了朝鲜,从此大唐和新罗非常友好,关系密切。很多新罗人来到唐朝,学习文化、做官、做生意、出苦力、当后兵、当船工、当奴婢,有的长期居住在中国,主要分布在东南沿海和大运海沿岸地区。
*장보고가 세운 산동반도 적산원에 세워진 "중국제일해신상(中国第一海神像)"
장보고 해신을 의미한다.
http://citylife.house.sina.com.cn/detail.php?gid=333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