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9일 토요일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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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나라로-한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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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과 우울증>
또 한 사람의 연예인이 아까운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TV에서 늘 얼굴을 보던 연예인의 자살기사는 마치 가족이나 친구처럼 느껴지는 까닭에, 얼굴모를 누군가의 기사보다 훨씬 그 충격이 크다.

<베르테르효과> 계속해서 매체를 통해 자살의 이유나 방법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보도가 되고, 어떨땐 지나치리만치 선정적으로 소개되고 있어 기사를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후유증이 크다. 또 연예인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가진 청소년들이나 해당 연예인에 동질감을 느끼던 사람들에게 모방자살의 충동을 느끼게 해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베르테르효과'라고 하는 이런 현상은 작년 최진실씨의 자살이후 얼마간 우리 병원외래에서도 볼수 있었는데, 찾아오는 환자분들 가운데 우울증과 자살충동을 호소하는 경우가 갑자기 늘었었고, 특히 최진실씨에게 많은 동질감을 느꼈던 주부들의 내원이 훨씬 늘었었다.


작년부터 연예인의 자살사건과 우울증을 앓아왔었다는 보도들을 연이어 볼 수 있었는데, 이번 장자연씨의 경우처럼 대부분 자살의 이면에는 우울증이 존재한다. 실제로 어떤 기사를 보면 연예인의 80%가 우울증을 경험해봤다고 한다. 일반적인 우울증의 유병률이 10-25%인데 비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돈도 많이 버는 선망의 직업인 연예인이 왜 훨씬 더 많이 우울증을 경험하는 것일까?

<연예인의 직업병?>

사람들이 연예인을 동경하는 이유는 돈과 명예가 따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연예인의 경우엔 대부분 성격상 감성이 풍부하고, 자기애적 성향(나르시즘)을 가진 경우가 많다. 자기애적 성향의 경우,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말 한마디에도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 또한 악플과 인기의 하락등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겪어야할 일종의 직업병도 한층 더 큰 스트레스로 작용 한다

<화무십일홍>

꽃이 아무리 붉어도 열흘을 넘길 수 없다는 얘기처럼 인기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아무리 지금 별처럼 빛나는 스타도 나이를 먹는 걸 피할 수 없다. 게다가 그 과정을 모든 대중들이 지켜보게 된다. 연예인의 숙명이다. 젊었을 때부터 50대 60대까지 그 목표를 이뤄가는 다른 직업과 달리, 가수나 연기자의 경우 조금이라도 어릴 때 빨리 성공해야 된다는 생각에 쫓기게 된다. 오랫동안 탑스타로 국민배우의 자리에 있었던 최진실씨 같은 경우도 인터뷰에서 "인기가 제일 절정이었을 때도 언제 인기가 식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극도로 불안함과 스트레스를 느꼈었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던 것처럼 인기가 오를수록 그 끝에 대한 불안은 오히려 점점 더 커져간다. 대중의 사랑으로 존재할 수 있고 누군가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어야 방송에 나올 수 있는 연예인에게, 인기하락에 대한 불안은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미지의 함정>

청순함과 섹시함 또는 사차원이미지까지 연예인들은 다양한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게 된다. 물론 실제의 모습과 다른 경우가 많지만, 대중은 실제의 모습도 그 이미지와 같기를 강요한다. 그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보였을 때, 실망하고 비방하고 그로 인해 인기가 떨어지는 현실에 누구도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요구되는 이미지대로 살게 된다. 섹시한 연예인은 원해도 섹스하는 연예인은 원치 않는 다는 누군가의 얘기처럼.

인터넷의 발달로, 사인한번만 거절해도 바로 당일 포탈게시판에 000이 건방지다란 글이 올라오는 현실이다. 어느 경우에도 항상 완벽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는 늘 부담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사생활은 어디에?>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에게 연기할 수 있는 기회도 소중하지만, 카메라 뒤편에서 편안하게 다른 사람 흉을 볼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 특히 유명인일수록 더욱 프라이버시는 적다. 정신과의사인 필자도 진료실 밖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나 다른 모임에서까지도 가운 입은 모습에 늘 진지한 얼굴로만 살아야한다면 과연 그 삶이 행복할까? 사람들은 누구나 사회에서 쓰는 가면을 벗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연예인은 누구를 만나도, 헤어져도 가족에게도 숨기고 싶은 얘기까지 신문이며 티브이에서 화제 거리가 된다.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기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24시간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살아야하는 연예인에게, 카메라도 악플도 존재하지 않는 편안한 쉼터가 아쉬운 현실이다.

<악플과 루머>

댓글은 인터넷시대의 새로운 문화이자, 자유로운 의견게시와 토론이라는 긍정적인 의미가 더 많다. 하지만 익명성과 군중심리라는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질투나 공격성, 관음증 등의 인간본성이 '악플'이라는 어두운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대상은 선망과 시기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연예인을 향할 때 가 많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공격당하고 모함당하는 경우, 피해의식과 공격성, 분노가 마음속에서 자라게 된다. 그 분노와 공격성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 없는 연예인의 경우, 분노가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면 우울증상과 자살에 대한 충동으로 바뀌게 된다. 우울증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 때, 위험한 선택으로 가지 않게끔, 연예인들을 보호하고 적극적으로 도움 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기고: 마음과 마음 수지점 강성민 원장>

(끝)

출처 : 마음과마음정신과

본 콘텐츠는 해당기관의 홍보자료임을 밝혀드립니다.




27일 목매 숨진 배우 우승연.
1985년 5월 24일 ~ 2009년 4월 27일 사망

ⓒ 마이데일리

오늘날 연예산업은 철저한 스타시스템으로 구동된다. 스타시스템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음악도, 영화도, 드라마도, 모두 스타를 만들어 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스타란 그 개인의 < personality > 가 다양한 연예산업의 기제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진 < character > 로 환치된 것이다. 대중은 결코 스타의 개별적 품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감동시켰던 연예 콘텐츠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고 나아가 동일시(identification)하게 된다. 연예인들의 잇따른 자살사건, 우울증, 마약사건은 이러한 연예산업, 스타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본질에서 비롯되었다.

한 인간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고(혹은 버리고) 영화나, 드라마, 음악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을 때 실존적 자아와 만들어진 이미지 사이의 괴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세상 모든 영광과 행복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스타들의 심리가 불안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더욱이 스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일상이 공공의 일상이 되어 버린 공포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때 정체성을 잃어버린 스타의 불안은 가중될 수밖에 없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단지 먹고사는 문제의 고달픔이나 확실치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 더욱 심각하게 연예인들을 위협한다.

문제는 이들 연예인들이 마음 놓고 이러한 심리적 상처를 치료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해외 스타들은 파파라치로 인한 사생활 노출과 극심한 언론공세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러한 문제에 있어 스스럼없이 병력을 공개하거나 치료중이라는 사실을 밝히는데 반해 한국에서 인기절정의 스타가 정신과 상담이라도 한번 받았다는 것이 언론에 알려지면 그(혹은 그녀)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야말로 연예인들의 죽음을 조장하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병을 병으로 인식하지 않고 숨겨야 할 비밀이나 치부로 여기는 시선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꽃' 같은 연예인들의 애석한 죽음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데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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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들이 연예활동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는 분명히 일반인보다는 많을 게 확실하다... 인기하락에 대한 두려움, 일상 생활과 동떨어진 생활, 많은 사람들의 관심... 등등...

그렇다고 자살을 택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배신이며, 남은 사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는 일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너무나 큰 짐을 함께 공감해 주지 못하고, 이해해 주지 못함에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ㅠㅠ 그립습니다...ㅠㅠ
1. 이은주

1980.11.16 ~ 2005.2.22 (26세 자살)

비교적 부주류 영화에 출연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가는 모습을 쭈욱 지켜보고 싶었는데... The Corr의 Only When I Sleep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 사진은 참 이은주 씨를 기억나게 한다...ㅠㅠ


2. 김광석

1964.1.22 ~ 1996.1.6 (33세 자살)

대학로에서 했던 콘서트에 가 보고 완전 반했는데... 지금도 노래방에서 김광석 노래만 불러요... 서른 즈음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거꾸로 가는 자전거... 일어나.. 등등...


3. 정다빈

1980.3.4 ~ 2007.2.10 (28세 자살)

옥탑방 고양이에서 보여준 귀여운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4. 박용하

1977.8.12 ~ 2010.6.30 (34세 자살)

명품연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은은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참 좋아했었는데... "작전"이 그의 유작이 될 줄이야...


5. 김성재

1972.4.18 ~ 1995.11.20 (24세 사망)


듀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힙합 그룹... 이만한 듀오를 또 볼 수나 있을까..? 타살 의혹도 있긴 하네요... "여름 안에서"에서 이현도와 함께 췄던 춤은 참 기억에 남네요...

6. 장덕

1962.4.21 ~ 1990.2.4 (29세 자살)


한때 천재 싱어송라이터로 불렸던... 앳된 모습이 영원히 나의 기억에 남아 있어요... 오빠(장혁)의 빈자리가 컸을까..?


7. 최진실

1968.12.24 ~ 2008.10.2 (41세 자살)

내가 좋아 한 연예인은 아니었지만, 참 많은 영광과 시련을 보낸... 그래서 참 안쓰러운...


8. 최진영

1971.2.27 - 2010.3.29 (40세 자살)


누나(최진실)의 공백이 자신의 삶을 포기할 만큼 컸던 게지...


9. 안재환

1972.6.8 ~ 2008.9 (37세 자살)


참 선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무엇이 당신의 단추를 잘못 꿰게 만들었을까...?


10. 유니

1981.5.3 ~ 2007.1.21 (27세 자살)

인기를 향한 갈망은 실패에 대한 좌절감도 크게 만들겠지...


11. 서지원

1976.2.19 ~ 1996.1.1 (21세 자살)

당시, 미소년 가수로 인기를 끌고 너무나 큰 부담이 있었을까...?


12. 김다울

1989.5.31 ~ 2009.11.19 (21세 자살)


한국 모델로서는 참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냈는데, 어떤 부담감이 자살에 이르게 했을까...?


13. 곽지균

1954.11.10 ~ 2010.5.25 (57세 자살)


"겨울나그네", "젊은 날의 초상" 등 상당히 감성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셨는데...


14. 여재구

1970.9.22 ~ 2007.5.28 (38세 자살)

"단역배우", "재연배우"라는 수식어보다는 "영원한 연극배우"로 남아 있길...


15. 장자연

1980.1.25 ~ 2009.3.7 (30세 자살)


연예인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는 과정은 얼마나 치열할까...?


16. 김석균

1979.4.9 ~ 2009.1.17 (31세 자살)

유명배우가 가지는 스트레스 못지 않고, 무명배우로서의 서러움 또한 컸으리라...


17. 김지후

1985.7.11 ~ 2008.10.6 (24세 자살)


트랜스젠더와 함께 한국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커밍아웃"... 그렇다고, 악플과 비난으로 죽음으로 몰아 넣지는 말아야...


18. 이서현

1979.9.16 ~ 2008.12.1 (30세 자살)


5인조 보컬그룹인 "엠스트리트"의 멤버... 30세까지 한 길만을 달려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을 때의 좌절감...


19. 우승연

1983.5.24 ~ 2009.4.27 (27세 자살)

자신의 미니홈피에 "안녕"이라는 글만 남기고 가면...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요...?


20. 장채원 (본명 장정한)

1982.?.? ~ 2008.10.3 (27세 자살)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은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스트레스일거야...


21. 이창용

1971.?.? ~ 2009.3.12 (39세 자살)

경제적인 어려움이 목숨을 스스로 거둘 만큼 힘든 일이 되어 버린 세상...

22. 이혜린 (예명 : 유주)

1985.3.22 ~ 2010.10.23 (26세 자살)

레이싱 모델로 활동하고 "쎈" 그룹에서 가수 활동을 하다가 가수 활동이 부진하자 우울증에 자살...

23. 박서린 (본명 : 박혜상)

1981.5.12 ~ 2010.11.12 (30세 자살)

2005년 채널CGV 시트콤 "압구정 아리랑"에 출연한 여배우라고 하는데, 자택에서 자살... 역시나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에 의한 것일까...?

24. 채동하 (본명 : 최도식)

1981.6.23 ~ 2011.5.27 (31세 자살)




 SG 워너비 출신의 가수 채동하가 솔로로 활동함에 따른 부담감으로 자살... 연예인들이 가지는 부담감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인가...?

25. 한채원 (본명 : 정재은)

1985 ~ 2011.8.25 (26세 자살)
 



유명해지지 않음에 절망하고, 유명해질 희망이 없음에 자살한 것도 부족해서 1개월이 지나서야 자살한 사실이 밝혀지다니 연예인의 유명세에 대한 갈망은 확실히 보통 사람이 상상하기 힘든 거 같다...

26. 김추련 (본명 : 김성호)

1946 ~ 2011.11.8 (65세 자살)



또 한 분의 원로 배우께서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하였다... "겨울여자" 라는 영화로 내가 기억하는 배우인데, 배우의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달리 일반인이 모르는 숨은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거 같다...

27. 정아율 (본명 : 정아율)

1987 ~ 2012.6.12 (26세 자살)


나는 원래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 배우인데, 기사 상으로는 생활고에 시달려서 자살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제 26세이면 젊은 나이인데, 앞으로 펼쳐질 행복한 세상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28. 남윤정
 

1954 ~ 2012.8.1 (59세 자살)



기사를 보면 남편과 사별 이후,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서 자살했다고 한다.. 한 가정에서의 가장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거 같다... 참 편안한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하셨는데...




어쩌다 연예인 자살공화국이 됐나

엔터미디어|
배국남|
입력 2012.06.16 13:10
|수정 2012.06.1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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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예인 자살 급증세,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 연예인 자살, 앞으로가 더 문제

[엔터미디어=배국남의 직격탄] 또 안타까운 죽음이 많은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한 무명 신인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KBS < tv소설-사랑아 사랑아 > 에 주인공 친구역으로 출연했던 정아율이 스물다섯 젊디 젊은 나이에 연기자로서 꿈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12일 서울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수많은 대중매체는 정아율의 자살원인을 우울증에서부터 돈문제, 생활고, 무명연예인의 현실과 고통 등을 꼽는 추측성 기사들을 쏟아냈습니다.

정확한 자살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채 그녀가 페이스북에 남긴 "사막에 홀로 서 있는 기분. 열아홉 이후로 쭉 혼자 책임지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내 방에서 세상의 무게감이 너무 크게 느껴지고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공포가 밀려 온다"는 글만이 그녀의 심경을 어렴풋하게 엿보게 할 뿐입니다.

그동안 연예인의 자살은 외국의 특수한 사례로만 여겨질 만큼 우리와는 무관한 국내 연예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인식돼왔습니다. 대중문화 초창기였던 1926년 '사의 찬미'를 불러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성악가 윤심덕이 연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1996년 가수 서지원(20)이 2집 앨범 발표를 앞두고 자택서 유서를 남긴 채 목숨을 끊었고 같은 해 영원한 가객, 김광석(31)이 자살해 대중과 연예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예인 자살은 우리사회에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예외적 사건에 속했습니다.

그러다 지난 2005년 2월 22일 스타 이은주(25)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라는 메모를 남기고 자살한 이후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이 계속 이어져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은주의 자살이후 가수 유니, 안재환 등 수많은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박용하 최진실 같은 톱스타에서부터 정다빈 최진영 같은 유명 연예인, 장자연을 비롯한 신인탤런트, 그리고 정아율, 유주, 한 채원, 박혜상 같은 무명 연예인 등 수많은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지난 1월20일 전남 순천에서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꿈을 이룰 수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연예인 지망생인 고교생 김모양(18)이 자살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그야말로 연예인 지망생에서부터 톱스타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인 연예인의 자살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수많은 연예인들의 자살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도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연예인 지망 열기는 상상을 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케이블TV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 슈퍼스타K3 > 에 참가 신청자만 197만명에 이르고 연예인이 아닌 연예인이 되기 위한 연습생을 선발하는 유명 기획사 오디션도 수만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은 이제 일상의 풍경이 됐습니다. 방송 연예과, 연극영화과, 실용음악과 등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대학 관련학과는 입학 경쟁률이 가장 높은 학과라는 표현은 이제 진부한 것으로 전락될 만큼 확고한 현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연예인 지망생 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연예인 지망생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연예계와 대중문화 시장의 수요 인력에는 한계가 있는데도 방송사나 대학, 기획사 등은 꿈을 실현하라며 묻지마 연예인의 지망 열기를 고조시키는데 혈안이 돼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연예인들의 비극적인 자살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로지 연예인 지망생의 꿈을 내세우며 이윤창출에 직결되는 연예인 지망 열기를 고조시킬 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방송사에서, 기획사에서, 길거리에서 화려한 연예인의 꿈을 광고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연예인 지망생으로 몰아가는 상황에서 대중과 사회에 큰 영향을 주는 연예인의 자살사건은 끊이지 않고 발생하고 있습니다.

연예인 지망생 공화국이 이제 연예인 자살공화국으로 변화하는 끔찍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연예인의 자살 역시 자살률 높은 우리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요. 한국의 2010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31.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위, 세계 2위이고 하루 42명이 자살하는 셈입니다. 끔찍한 대한민국의 현실이지요.

왜 예외적이고 이례적인 연예인의 자살이 이제는 일반적인 현상이 돼버린 걸까요. 왜 최근 들어 한국 연예인들의 자살이 줄을 잇는 걸까요. 연예인의 자살을 초래한 원인은 사업실패, 생활고, 가정불화 등 개인적인 신상의 문제에서부터 연예기획사의 실태, 연예계와 대중문화 산업적 메커니즘의 특성, 연예인의 직업적인 특수성, 연예인을 수요 하는 대중매체의 현황과 문제, 연예인을 소비하고 소구하는 수용자의 행태와 인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가수 지망생 김모양의 자살처럼 연예인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실과 연예계 데뷔할 수 없다는 불안한 미래 등이 자살원인으로 작용을 하는 연예인 지망생들의 자살, 연예계에 데뷔했지만 출연기회나 무대에 설 기회조차 잡지 못하며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고통스러운 현실에 좌절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무명, 신인 연예인들, 그리고 성상납 강요, 폭행 등 연예계의 부조리와 병폐에 고통 받다 죽음을 선택한 장자연 같은 일부 연예인의 자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라는 메모에서 알 수 있듯 우울증의 고통에 시달렸던 이은주나 악성루머와 악플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은 톱스타 최진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예인들의 추정되는 자살원인은 매우 다양합니다. 물론 이는 추정 되는 자살 원인 일뿐 정확한 자살원인은 아닙니다.

연예인의 자살은 개인적인 문제 등이 원인일 수 있지만 대중문화 시장과 연예계 구조, 그리고 연예기획사 등 스타시스템의 문제 등 구조적인 부분과 연예계의 특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기 절정의 톱스타에서부터 단역, 무명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연예인은 영화,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음반 등 매작품의 흥행 성공여부에 따라 몸값과 인기도가 달라집니다. 이윤 창출에 올인 하고 있는 상당수 연예기획사가 연예인의 정신적, 육체적 건강보다는 오로지 보다 많은 수입창출에 무리한 스케줄을 소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연예인의 소외감과 우울증 등 정신적, 육체적 질환으로 이어지면서 연예인 자살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연예계의 특성상 스타급 연예인들은 인기 부침에 따른 위상과 활동, 대중의 시선변화에 대한 불안감이 크고 이것이 극단적인 선택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화려한 꿈을 꾸며 연예인 지망생과 연예계 데뷔 신인 연예인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대중문화 시장의 한계로 인해 꿈을 펼칠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생활고와 불안한 미래에 대한 초조감을 겪으며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이들 중 일부가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연예인과 스타 같은 유명 인사들의 자살에는 유명성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유명도나 인기를 얻지 못해서 생긴 좌절, 대중의 인기와 관심 그리고 엄청난 수입창출로 해결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문제 등이 관련돼 있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또한 장자연의 유서에서 밝혔듯 신인이나 연예인들에게 가해지는 성상납, 부당한 계약과 공정하지 못한 출연관행 등 연예계의 각종 병폐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에 대중매체와 연예기획사, 연예인에 의해 구축된 이미지와 실제 자연인으로서의 삶과의 간극과 괴리로 인한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 예술적 한계와 능력의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대중의 근거 없는 비난과 악성루머의 유포도 연예인의 자살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일거수 일투족이 대중과 대중매체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연예인들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이나 육체적 질환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이것이 종국에는 돌이킬 수 없는 충격적인 삶의 종지부를 찍는 비극적인 선택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연예인 자살공화국'이라는 오명의 표현이 일반화될 정도로 연예인 지망생에서부터 톱스타에 이르기까지 연예인의 자살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우리사회의 대책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예인 자살 사건이 일어날 때만 정부나 연예계 종사자나 일부 관련 단체들의 요란한 일회용 전시성 대책의 목소리만 난무합니다. 그뿐입니다. 실질적인 제도나 대책 실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현재에도 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연예인 자살이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지만 이것은 앞으로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최근 들어 연예계에 데뷔하는 연예인과 연예인 지망생들이 점점 어려져 초중고생 때 연예계에 데뷔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삶을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교육받거나 습득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가수나 연예인이 되기 위한 테크닉이나 스킬 숙지에 올인 하는 연예인 지망생들이 많습니다.

인간존재에 대한 튼실함이나 정신적인 건강함을 유지하며 어려움을 잘 극복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 자리 잡기위한 소중한 교육이 생략된 채 오로지 연예인과 스타 되기에 올인 하며 살아온 어린 연예인들은 인기하락 등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연예계에 활동할 기회를 잡지 못하는 좌절을 맛 봤을 때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현재보다 훨씬 많아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연예인 자살은 앞으로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며 그래서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대중문화전문기자 배국남 knbae@entermedia.co.kr

[사진=마이네임이즈 엔터테인먼트, MBC, 영화 < 오 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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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이혜린 자살 충격…레이싱걸 ‘퀸’에서 죽음까지…연예인 얼마나 힘들었기에
이혜린은 누구?…2005년 8월 데뷔, 레이싱 모델 1,2위 다투기도
입력 2010.10.27  02:10:40최서준 기자 | bstaiji@naver.com  
▲ 사진/디시인사이드
[프라임경제] 레이싱모델 출신의 가수 이혜린이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혜린의 측근에 따르면, 평소 우울증을 앓았던 이혜린은 지난 22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혜린은 지난 2008년 여성그룹 쎈으로 가수 활동을 시작했으나 그룹 활동이 잘 되지 않아 이후 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올해 초 새롭게 가수 준비를 한 것으로 확인돼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지난 2005년 8월 레이싱걸로 데뷔했던 이혜린은 활동 내내 귀엽고 깜찍한 얼굴과 늘씬한 몸매로 남성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 했다.
이혜린은 당시 신인으로서는 드물게 짧은 시간 안에 모바일투표 등에서 레이싱모델 순위 1,2위를 다투는 등 인기 고공행진을 달리기도 했으며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 덕분에 3천여명이 넘는 팬을 거느리기도 했다.

◆ 연예인 지망생들의 심적 고통은?  = 이혜린은 윤선혜, 이현진, 구은경과 함께 이른바 ‘미모의 레이싱걸’ 4인방에 속하며 사실상 레이싱걸의 퀸 자리를 넘보는 유명세를 치렀다.
지난 2006년에는 고품격 섹시 모바일 화보를 통해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내 수많은 남성팬도 확보했으며 같은 해 부산 국제 모터쇼에서 메인 모델로 활동하며,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매력적인 자태로 모터쇼 기간 내내 주인공인 자동차보다 더 주목받기도 했다.
이런 인기세에 힘입어 이혜린은 가수로 화려한 부활을 꿈꿨으나 꿈을 끝내 실현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것으로 관측돼 팬들의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한 누리꾼은 팬카페에 “유명하지 않은 연예인들이나 연예인 지망생들의 심적 고통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다”고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 팬들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이혜린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에 연예계는 발칵 뒤집혔다.
이날 이혜린 측에 따르면 장례는 이미 3일장으로 치러진 상태이며 발인은 지난 25일, 장지는 충북 보은으로 알려졌다.
이혜린은 특히 공백기를 끝내고 가수 활동을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뒤늦게 알려져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을 많은 팬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자살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선 우울증이나 스트레스가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이와 관련 이혜린의 전 소속사 TOM엔터테인먼트는 "이혜린이 심각한 우울증으로 겪어 왔다"고 전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고인의 뜻밖의 죽음에 동료들도 적잖은 충격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혜린은 1남 2녀 중 장녀다.
현재 이혜린의 팬카페와 포털사이트 등에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과 안타깝다는 내용의 글이 계속 올라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 사진출처/이혜린 팬카페
◆ 신성이었던 그녀 = ‘신성’(新星)이라는 수식어까지 달며 이혜린으로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가수 ‘유주’로서는 인기는 커녕, 이름 석자 조차 사람들은 몰랐다. 그렇게 세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고 그녀는 숨진 채 발견됐다.
언론들은 자세한 사망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평소 우울증을 앓아왔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고 한결같이 보도 중이다.
구체적인 자살 원인과 관련에선 유족들로부터도 그 어떤 설명조차 없는 상황이다. 유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혜린의 자살 소식을 접한 팬들은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며 레이싱계의 퀸으로 군림한 이혜린의 자살이라니 충격적이다” “화려한 연예인을 꿈꾸는 제2의 레이싱걸이 나타나지 않길 바란다” 등 한결같이 놀라고 충격적이라는 반응이다.
이와 관련 전 소속사인 T.O.M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자살 이유를 모르겠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 ‘흑인 음악’ 시도했지만 = 이혜린의 측근은 “얼마 전만 해도 복귀를 준비하던 것으로 아는데, 갑작스런 죽음에 놀랐다”면서 “부진한 활동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소속사를 옮겨 새 앨범을 준비해 왔다.
이혜린은 이른바 노력파 레이싱걸로 잘 알려져 있다. 다른 모델들에 비해 키가 작았지만 SKT, KTF 및 LGT에서 서비스 됐던 각종 '모바일 레이싱걸 선발대회'에서 인기투표 1위를 달리기도 했다.
여성그룹으로도 잠깐 활동했다. ‘나빴어’, ‘공주’, ‘괜찮아’ 등이 수록된 첫 번째 음반으로 복고느낌의 흑인 음악을 시도하기도 했다.
호소력 짙은 보이스를 주무기로 해, 강하고 비트있는 리듬을 멋지게 소화해 내 가요계의 새로운 폭풍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기도 했다. ‘여자 DJ DOC’로도 불리며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등, 말 그래도 ‘쎈’ 여자였지만, 우울증만큼은 이겨내지 못한 셈이 됐다.
◆ 연예인 계속된 자살에 국민 '허탈'  = 연예인들이 이처럼 계속 자살하고 있다. 국민은 연예계에서 들려오는 계속되는 이 같은 비보에 충격에 빠진 상태다.
4개월 전, 한류스타 박용하가 논현동 자택에서 목을 매 숨져 국민이 놀란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들려온 또 다른 안좋은 소식이다.
3월 29일에는 가수 겸 배우 최진영의 사망 소식이 알려졌고 앞서 2008년에는 누나 고 최진실의 비보가 국민의 귀를 놀라게 했다.
2005년에는 가수 유니와 배우 정다빈, 이은주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008년에는 연예인들이 자살이 유독 많았다. 최진실 자살 소식 후 곧바로 트렌스젠더 연예인 장채원과 김지후가 4일 간격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2009년에는 신인배우 장자연이 자살했다. 당초 우울증으로 알려졌던 그의 사망 배경에는 연예계의 성상납 비리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우리 사회가 진통을 겪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세계적인 모델 김다울이 프랑스 파리의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돼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준 바 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멋진 예술혼 불태우시길-







Michael Jackson - They Don't Care About Us...
http://www.youtube.com/watch?v=97nAvTVeR6o&feature=player_embedded


알프레드 비네
                   프랑스에서 19세기말                            
                  보충 수업이 필요한 아이들을 선별해 내기 위해 지능 검사를 만들었던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
                                                                                                              <출처 : Wikipedia>





삽살개와 마네키네코- 전래동화(개와고양이의 푸른구슬=견묘쟁주(犬猫爭珠))-연오랑 세오녀[延烏郎細烏女-장보고 [ 張寶高 ]
-->
옛날옛적에 - 개와고양이의 푸른구슬 전래동화 우리 겨레 옛이야기


                                          복을 가져다주고 악귀를 쫓는 삽살개,  복을 불러들인다는 고양이 마네키네코(위키백과)





옛날옛적에 - 개와고양이의 푸른구슬
전래동화 우리 겨레 옛이야기






이 작품의 근원설화로는 동물보은담(動物報恩譚)·


견묘쟁주(犬猫爭珠) 견묘보주탈환(犬猫寶珠奪還)’ =)옛날옛적에 - 개와고양이의 푸른구슬


우리나라에서는 서울·개성 중심 중부지방의 설화.
 
이 설화는 부리아트족(바이칼호 동부 몽골족)에서 유래.
고려 중엽 이후 많은 몽골인·거란족이 이주, 귀화할 때
가지고 온 설화로 보이며 삼남지역은 그들의 귀화 정착지



고양이가 사람과 가깝게 지내게 된 연유를 풀이한 설화이다.
 
한 어부가 잉어로 변신한 용왕의 아들을 방생(放生)해 준 데 대한 보은(報恩)으로 여의보주(如意寶珠)를 얻었는데, 방물장수 할미의 꾐에 넘어가 빼앗겨 버린다. 이에 의분을 느낀 그 집의 개와 고양이가 탈환에 나서, 여의보주를 되찾아 돌아오다가 그만 개가 실수하여 강물에 떨어뜨렸는데, 고양이의 기지로 되찾게 되었으므로, 이에 보답하는 뜻에서 고양이를 그때부터 방 안에서 키우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유사한 설화가 부리아트족(Buriat 族:바이칼호 동쪽에 사는 몽골족)에게도 있는 것으로 보아, 몽골인과 거란족이 한국에 귀화할 때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출처] 견묘보주탈환설화 | <doopedie두산백과>
                                                                                                                                       <doopedie두산백과>





............귀화 몽골인과 거란족.......................
천년 전 중국 동북 중원을 장악했던 요(遼)나라 거란(契丹)족
거란은 993년부터 세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던 강국이었다.
1018년 강감찬 장군이 적장 소배압을 상대로 귀주대첩을 거둔 것
 
거란은 그후 고려에 대한 야심을 접었는데
몽골이 세운 원(元)대 이후 자취를 감췄다.
 
어떻게 거란족이 한순간 사라지게 되었을까?
 
중국 서남쪽 윈난(雲南)성 일부 지역에 사는 다얼족
거란의 시조 '야율(耶律)'을 사당에 모신 사실이 확인.
거란족 후예들은 왜 이처럼 멀리 떨어져 살아남은 걸까?
 
거란족은 징기스칸 당시 몽골군 전위부대였기 때문.
 
요나라 멸망 뒤 자신을 공격했던 금(여진족 왕조)을 증오
거란족은 몽골 칭기즈칸과 손잡고 원 왕조 정복부대의 선봉
 
그 결과 거란족은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됐고
결국 중국 내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할 기회를 상실.
거란족 일부는 요나라 멸망뒤 현재 이란 지역으로 이동
 
'이슬람 세력으로 귀화했다는 설도 유력.'
 
고려 말 80년간 원나라 지배를 받았던 고려.
고려는 중국 송나라와 밀접한 무역 교역 국가.
 
거란과 중국 송나라 관계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
송나라는 문치주의 정책으로 힘이 미약했던 왕조
거란에게 조공을 해야만 명맥이 유지되었던 송나라.
 
1005년 매년 20만필의 비단과 10만냥 은을 거란에 조공
그 조건으로 거란과 송나라는 상호 평화조약을 맺게된다.
거란은 북경[유주-엣 지명]과 대동을 점령하는것으로 만족.
 
1005년 [제1차조약]거란과의 조약과 1042년[제2차조약]
송나라 조정은 거란에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조공.
 
1042년 거란과,송과의 관계는 형제 관계로 조약을 체결하고
매년 바치는 세제도[세금-조공물] 은 20만냥과 비단 30만필
송나라는 매년 막대한 조공을 거란에게 바쳐 국가 명맥 유지.
 
원나라 지배를 받던 고려에 대거 유입된 거란족.
몽골군 정예부대로 삼남지역 경계선에 주둔한듯.
그후 원나라가 역사에서 사라지자 한반도에 귀화.

지리산 이야기 - 아흔 일곱. ( 흥부전. 제비꽃. 오랑캐. 달오름 마을. )


비유적으로 보면
용궁과 용왕은 화산폭발?이 아니었을까
인물들은 비단장수, 방물장수는 중국
그 외 존재들 (개와 고양이)한국과 일본 거란 몽골~
june.







*연오랑 세오녀 [延烏郎細烏女]







                                                                                                                  엮인글  http://chlgmlfks1.blog.me/150095155238
                                                                                                                           http://blog.daum.net/chocoty62/91














신라 제8대 왕 아달라왕실록 ㅡ ③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와 그 배경에 숨겨진 비밀 신라왕조실록
 
 
 



『삼국유사』 기이편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설화가 전한다. 그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괄호 속에 있는 것은 편자 일연이 보충한 말이다).
 

 

 
제8대 아달라왕 즉위 4년 정유년, 동해 해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닷가에 나가 미역을 따는데 갑자기 웬 바윗돌(혹은 고기)이 나타나서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보고 말하기를 “이는 비상한 인물이다.” 하고 건져올려 왕으로 삼았다( 『일본제기』를 보면 전이나 후나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자가 없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니 제대로 된 왕은 아니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나가서 찾아다니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고 바위 위에 올라갔더니 이전처럼 바윗돌이 그녀를 태우고 갔다. 그것을 본 그 나라 사람들이 놀랍고 기이하여 왕에게 아뢰어 바쳤더니, 부부가 서로 만났고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의 빛이 없어지매, 일관이 아뢰되 “우리 나라에 내려와 있던 해와 달의 정기가 지금은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런 괴변이 생겼습니다.”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오라고 했더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이다. 이제 와서 어떻게 돌아갈 수 있으랴. 나의 왕비가 짠 세초(細稍, 생사로 얇게 짠 비단)가 있으니, 그것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다.” 하고 그 생초를 주었다.
 

 
사신이 신라로 돌아와 연오의 말을 전하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이전처럼 되었다.
 

 
그 생초비단을 어고(御庫)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고방을 귀비(貴妃, 세오를 지칭함) 고방이라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이라 하였으며, 또 도기야라고도 했다.
 

 

 
이 설화의 주인공 연오와 세오의 이름에는 공통적으로 까마귀 오(烏)자가 들어 있는데, 이름에 같은 글자가 공통으로 들어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이 부부이기 이전에 남매였음을 시사한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남매간에 결혼하는 일이 허다했고, 특히 특정한 직업이나 계층에서는 거의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삼국사기』나 『화랑세기』가 보여 주듯 신라 왕족들은 이복 남매 또는 삼촌, 사촌 간에 자유롭게 결혼하였다. 신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일본도 남매간에 결혼하거나 사랑한 예들을 『일본서기』를 통해 숱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결혼 형태는 고려 시대까지 이어져, 고려 태조 왕건은 자기 손으로 자식끼리 결혼시키기도 했다.
 

 
혈족끼리의 결혼은 대개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거나, 자기 가문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고유한 기술이나 능력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연오와 세오의 결혼은 아마도 두 번째 경우, 즉 자기 가문에만 전해져 오는 고유한 능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오와 세오는 어떤 능력을 가진 집안 출신일까?
 

 
연오와 세오가 신라 땅을 떠난 뒤, 갑자기 태양과 달이 빛을 잃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일월의 빛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뜻이다.
 

 
태양과 달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양과 음의 대표 명사였다. 하지만 달은 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태양은 양의 정기로서 이것의 변화는 국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겼던 반면, 달은 음의 정기에 불과하기에 양에게 자극을 받아 변화가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삼국사기』에 일식에 관한 기록은 67건이나 있지만, 월식에 관한 기록은 단 한 건도 없다.
 

 
태양이 달에 가려 일시적으로 지구에 빛을 전달하지 못하는 이 일식 현상에 대해 적어도 조선 시대까지는 불길한 일을 예고하는 흉조로 인식됐다. 그래서 일식이 있을 때는 근신하고 반성하여 이 흉조가 실제적인 재앙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기원하였다.
 

 
연오와 세오가 신라 땅을 떠난 뒤 태양과 달이 빛을 잃었다는 것은 일식과 월식이 차례로 이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연오와 세오는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났을 때 행하는 행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까지 사람들은 자연의 이상현상을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해석했는데, 특히 일식은 가장 심각한 일이었다. 태양은 제왕을 상징하는데, 태양이 그 빛을 잃었다는 것은 제왕이 그 본래의 빛을 상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식이 일어나면 제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일식 현상을 빨리 타개하기 위해 왕은 백관을 이끌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스스로의 부덕을 고하였다.
 

 
일식 때 행하는 제사를 구식의(救食儀)라고 하는데, 이는 일식(日蝕)을 구제해 달라는 의식이다. 『고려사』 ‘예지’ 에는 구식의를 행할 떄 왕과 백관이 모두 소복을 입고 하늘에 잘못을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때에는 이미 천문 계산에 의하여 일식이 일어나는 원인과 그 날짜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구식의를 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일식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는 뜻이다.
 

 
일식(日蝕)의 ‘식(蝕)’ 은 ‘벌레가 먹어 치운다’ 는 뜻인데, 이때 ‘蝕’ 대신에 ‘食’ 을 쓰기도 한다. 즉, 고대인들에게 일식이라는 것은 ‘벌레가 해를 잡아먹는 것’ 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태양을 갉아먹는 이 벌레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있었다. 그 동물이 바로 까마귀였다. 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길조였으며 신령스런 동물이었다. 또 그 새까만 깃털 탓에 불에도 타지 않는 동물로 여겨졌다. 새까맣게 타 버린 숯은 더 이상 불에 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까마귀를 태양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타 죽지 않는 유일한 동물로 여겼던 셈이다. 따라서 태양을 갉아먹는 벌레들을 잡기 위해서는 태양 속으로 까마귀를 들여보내 벌레들을 모두 잡아먹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태양신화에서 태양의 정기를 세 발 달린 까마귀로 형상화해 놓은 것이나, 고구려 고분 벽화의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인 삼족오가 그려져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바로 태양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식이 일어나면 하늘로 까마귀를 날려 태양을 갉아먹는 벌레들을 잡아먹도록 했을 것이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로 일식 때에 까마귀를 하늘로 날리는 소임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오랑이라는 이름을 풀이하면 ‘까마귀를 끌어들이는 남자’ 라는 뜻이다. 즉, 연오랑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의 소임을 나타내는 직업적인 명칭으로서, 일식이 일어나면 까마귀를 불러들여 잡은 뒤, 다시 태양을 향해 날아가도록 풀어 주는 소임을 맡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까마귀를 불러들이고 기르고 날리는 기술은 연오랑의 가문이 대대로 계승한 독특한 능력이었을 것이다. 그 기술이 다른 가문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남매끼리 결혼시켰을 것이다.
 

 
세오녀는 필시 생초비단과 관련이 있을 법하다. 신라에서 온 사신에게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으로 제사를 지내라고 한 것으로 봐도 이는 명백하다.
 

 
당시 까마귀를 날려 일식을 물리치는 제례 과정을 추측해 보면, 세오녀의 역할은 더욱 명백해진다. 일단 일식이 일어나면 왕과 백관들은 모두 상복을 입고 나와 하늘을 향해 엎드릴 것이다. 그러면 연오랑은 까마귀를 미리 잡아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으로 감싸 뒀다가 풀어 날리게 된다. 까마귀를 날린 다음에는 그 생초비단을 제단에 올려놓고 왕이 제주가 되어 제사를 지낸다.
 

 
그렇다면 세오녀는 바로 해를 갉아먹는 벌레를 퇴치하기 위해 하늘로 날려보내는 까마귀를 감싸는 생초비단 보자기를 짜는 일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아달라왕 13년(166년) 정월 초하룻날 일식이 있었다. 다른 날도 아닌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일어났으니, 신라 전국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그로 인해 왕은 두려움에 떨고, 백성들은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만약 이때 일어난 일식이 부분일식이 아닌 개기일식이었다면, 그 공포와 두려움의 강도는 한층 더했을 것이다.
 

 
왕과 백관들은 이 불길하고 어지러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급히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를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아달라왕 4년에 이미 왜국으로 떠나고 없었다. 왜국으로 떠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왜인들이 은밀히 데려갔거나 납치한 듯하다. 만약 왜인들이 정중히 부탁하여 데려갔거나 연오랑 스스로 망명했다면 필시 세오녀를 대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 세오녀를 그대로 두고 혼자 왜국으로 갔다. 이는 스스로 원해서 떠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당시 일식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신라에 일식을 물리치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히 사람을 파견하여 납치해 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비록 강제적으로 붙잡아가긴 했으나, 연오랑에 대한 왜국의 대접은 매우 극진했다. 땅을 떼 주고, 노비를 붙여 주고, 작은 지역의 호족으로 살 수 있게 해주었다. 신라에서 연오랑이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때는 오직 일식이 있을 때뿐이었다. 신라에서는 왜국에서와 같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을 리가 없다. 기껏해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식량과 부쳐 먹을 만한 밭뙈기 한두 마지기 받은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왜국의 대접은 융숭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아내 세오녀도 불러들인 것이다.
 

 
하긴 일식을 물리치는 일은 연오랑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 없이는 구식의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국 왕은 다시 신라에 사람을 보내 세오녀도 데려왔다. 연오랑이 왜국에 있음을 알려 주고, 그 증거로 그의 신발을 보여 주며 세오녀에게 함께 동행할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는 왜국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이 왜국으로 떠난 지 9년 뒤에 아달라왕에게는 너무나 불길한 일식이 발생할 것이라는 일관의 보고가 올라온다. 다른 날도 아닌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닥칠 것이라는 보고였다. 만약 아무런 대책 없이 정월 초하루에 일식을 맞을 경우 민심은 크게 흔들릴 것이고, 아달라왕의 자리도 위태로워질 게 뻔했다.
 

 
더구나 당시 아달라왕은 크나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일식이 있기 두 달여 전인 165년 10월에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했던 것이다. 비록 실패한 역모였지만 길선은 백제로 달아났고, 아달라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한 터였다. 이런 경황 중에 일식이, 그것도 정월 초하룻날 일어난다면, 그 일을 빌미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 백제와 대치하고 있던 신라 군대의 사기마저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위기를 느낀 아달라왕은 급히 왜국에 사신을 파견해 연오랑과 세오녀를 환국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왜국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난감해진 아달라왕의 사신은 환국이 불가능하다면 일식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애걸했다. 연오랑은 자기 아내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을 내주며 그것을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라고 했다.
 

 
일식이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래도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으로서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정월 초하루에 일어난 일식이기에 그 공포와 두려움은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달라왕은 어떻게 해서든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래서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 보자기를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왕실과 백관 그리고 백성들의 불안을 해소시켰던 것이다.
 

 
아달라왕은 재위 후반기 10년 동안 크나큰 시련을 겪었다. 그의 왕비 내례부인이 석벌휴의 아들 이매와 정을 통하고, 벌휴 세력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아달라왕과 벌휴의 싸움은 그후 1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결국 아달라왕은 반란군에 의해 불운한 최후를 맞이했다. 어쩌면 연오랑과 세오녀의 망명은 이러한 아달라왕의 불행에 하나의 불씨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아달라왕 시대의 세계 약사
 
아달라왕 시대 중국은 후한 말기에 해당되는 시기로 환관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정치 기강이 무너져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황건적이 세력을 형성한다. 또한 장각 형제가 백성을 선동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조조와 황보숭 등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이때, 로마에서는 페스트가 유행하여 이를 계기로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한층 심화된다.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자성록』과 파우사니아스의 『그리스 안내기』가 쓰인 시기이기도 하다.
 

 
▣ 출처 :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웅진지식하우스), 박영규 지음.





  연오랑 세오녀
일본왕가의 혈통변화.1 엮인글 http://blog.naver.com/zeburm/20108606019












고래
 

<스크랩자료임> 

장보고 [ 張寶高 ] 설화
신라의 무장.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려고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40년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출처] 장보고 | 두산백과
 
장보고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신라명신(新羅明神)으로 중국에서는 '中國第一海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당(唐)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후백제(後百濟)의 해적(海賊)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우리말로는 骨大島라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공(良貝公)은 이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하였더니,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좋겠다"고 했다. 이에 그곳 신령스러운 연못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물이 한 길이나 넘게 치솟는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서 자신은 서해약(西海若: 용왕, 필자 주)이라고 소개하면서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에 남겨 두면 순풍(順風)을 얻을 것이오." 라고 말했다. - <삼국유사> 진성여왕과 거타지(居타知)편 -
 

 
여기에서 골대도(骨大島)라는 말은 뼈가 큰 동물과 관련된 섬이라는 의미인데, 분명 고래 섬의 의미로 보인다. 뼈가 크다는 것은 고래토템시대에서 유래한 말로서 나중에 '기골이 장대하다'는 등의 신령한 토템지도자들에게도 사용된 뼈는 고래뼈에서 기원한 위엄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骨大島는 말하자면 '고래섬'인 것이다.
 
 
일부에서 골대도를 오늘날 백령도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骨大島(鵠島)는 "후백제의 해적이 나타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남 완도 인근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거타지 신화 자체가 완도 청해진 일대에서 해적을 정벌한 장보고 스토리를 배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남 진도(津島) 서남쪽 세방낙조전망대 바로 앞에 있는 곡도이거나 장보고가 청해진을 건설한 완도 자체를 의미한 것일 수 있다.
 

 
거타지 신화의 주무대인 곡도(골대도)가 어디인지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진주목'조에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이니 달리 거타(居陁)라고도 한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을 비롯하여 <삼국사기> 지리지 강주(康州)조에서 "거창군은 본래 거열군인데(혹은 거타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에 개명했다"라는 내용으로 경남 거창군을 곡도(골대도)로 보는 것도 무리다. 왜냐면 거타지는 사람 이름이고 섬 이름이 곡도(골대도)이기 때문이다.
 
 
 
곡도 즉 골대도는 고래섬이라는 것은 고래는 동해안을 중심으로 서해안보다 남해안이 고래가 상대적으로 더 출몰해 왔다. 따라서 거타지 신화의 골대도는 완도 인근의 섬으로 보아야 한다.
 

 
골대도의 연못에서 늙은 여우를 활로 쏘아죽이는 거타지 신화는 작제건 신화에서 '바위 섬'으로 표현되었다.
 

 
작제건 신화에서 작제건이 그의 아버지를 찾아 바다를 항해할 때 혼자 바위 섬에 남아 용왕의 요청으로 활로 바다 괴물을 쏘아 죽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거타지 신화와 같은 구조를 가진다. 이에 대해서는 <코리안 신대륙발견: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고래사냥 '작살잡이'에서 다루었다.
 
 
당나라로 가는 사신단 중에 혼자 골대도(骨大島 '고래섬')에 남아 "해적이 출몰하는 섬에 남아 있다"는 것은 장보고가 청해(완도)에 남아 해적을 무찌르는 것과 일치한다. 거타지(居타知)도 활 잘 쏘는 '활보(弓巴)'였다고 할 때 장보고의 본명이 어쩌면 거타지(居타知)였을 수도 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삼국유사> 거타지 신화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거타지는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나의 장기(長技)이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사라지고 거타지는 숨어서 기다렸다 (중략)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를 한다. "공의 은덕으로 내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말하고는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모시고 당나라로 가는 신라 사신(使臣)의 배를 따라 그 배를 호위하여 거타지가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했다 (중략)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오자 거타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 - <삼국유사> 진성여왕과 거타지(居타知)편-
 
 
거타지가 당나라를 다녀오는 스토리 구조와 장보고가 당나라로 가서 적산원에서 다시 신라로 돌아오는 과정에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거타지와 장보고 모두 활의 명수이고 해적을 무찌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거타지 신화는 장보고 이야기를 거타지 신화 형식을 빌려 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작제건 신화와 구조적으로 일치하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 신화 또한 장보고 이야기를 그대로 신화로 만들어 왕건의 조상이 장보고와 같은 항해자 영웅 집안임을 인위적으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장보고가 이들 두 신화의 실제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작제건 신화에서 용왕('西海若'이라 표현했다)과 늙은 여우(중으로 변신한)의 대결을 청룡과 흑룡의 대결로 표현했다. 활 잘 쏘는 작제건이 청룡(용왕)의 요청으로 흑룡을 쏘아죽이는 스토리는 그대로 작제건 스토리 구조를 가진다.
 

 
거타지가 당나라로 가는 사신단 수행원으로서 중간에 골대도 섬에 남게 되는 것과 같이 작제건 또한 당나라로 가는 도중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바위 섬에 혼자 남게 된다는 것과 일치된다.
 

 
풍랑이 심하여 작제건이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그곳이 용왕을 만나는 바위섬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섬은 거타지 신화에서도 용왕을 만나는 곡도(골대도)이다. 이들 두 인물은 완도에서 해적을 무찌르고 '해신'이 된 장보고 생애를 신화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신화는 권력에 밀려난 사람들이 무속적으로 전승되는 수가 많다.
 

 
고려말 최영장군의 무속에서 신화화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듯이 장보고는 신라왕실에서 암살당한 인물이었다는 것에서 이루지 못한 무속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다 활동에서 활의 명수 장보고는 고려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신라시대 인물) 신화와 <삼국유사>의 거타지 신화에서 보여주는 해상에서 활을 잘 쏜 신화의 주인공들의 실재인물이 되는 것이다.
 

 
장보고가 당나라 신라방 적산원에서 돌아와 신라 조정에서 청해(淸海)의 해적 소탕을 위한 군사를 요청하는데 그 과정이 거타지 신화와 일치한다.
 

 
장보고는 당나라로 가는 길목에 해적들이 출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왕의 허락을 받아 1만 군사로 청해(淸海:莞島)에 진을 설치하고 그 섬 가리포(加利浦)에 성책을 쌓아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가 된 장보고는 해적들을 완전 소탕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그대로 거타지 신화와 일치된다.
 

 
거타지(居陀知) 신화는 ≪삼국유사≫ 권2 기이편(紀異篇) 진성여왕(眞聖女王)과 거타지(居타知)조에서 거타지 또한 당나라로 가는 길목에서 해적을 소탕하는 영웅으로 등장한다. 장보고가 해적을 소탕한 청해(淸海) 가리포(加利浦)는 거타지가 해적을 소탕한 골대도(骨大島) 또는 곡도(鵠島)에 비견된다.
 

 
장보고는 신라 희강왕(837년)의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祐徵: 나중에 神武王)이 청해진에 오자 이듬해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839년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신무왕(神武王)에 옹림하고 자신은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여기에서 장보고는 민애왕을 죽이고 신문왕을 옹위하는데 가담한다는 스토리 구조는 거타지 신화에서 용왕을 죽이려는 중으로 변신한 늙은 여우를 활로 쏘아 죽여 용왕과 그 가족을 살리는 신화 구조와 유사하다. 거타지 신화는 용왕편에 서고 중과 늙은 여우를 병립시켜 불교와는 거리를 두는 면을 보여주고 있다.
 

 
장보고를 신라명신과 일체화시키는 일본인들의 신라신을 모신 신궁 신사들의 전통을 볼 때 장보고 또한 불교적인 인물이라기보다 신라의 해신신앙과 연관한 풍류신선도 중심의 인물이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타지는 자칫 그 당시의 불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수 있었던 용왕가족을 살려내는 인물로 묘사된 것은 고래신 숭배에서 해신신앙의 공통점을 거타지와 장보고에게서 볼 수 있다.
 
 
 

 
거타지가 용왕의 딸을 얻는 것처럼 장보고의 딸이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혼담이 오간다. 신무왕(骨大島)의 아들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장보고는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서 845년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궁중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혼담이 성사되지 못했다.
 

 
장보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로 들이려다 성사되지 못한 것은 신라의 고래토템과 용왕숭배가 결국 좌절된 것을 의미하지만, 나중에 '해신'을 추앙된 장보고는 '용왕'의 위치를 계승하는 상징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작제건 신화에서 용왕을 살려 그 딸을 데리고 나온다는 것은 작제건이 용왕의 가문을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의 원형이 장보고의 삶에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장보고가 무속적으로 해신이 된 것에서 장보고가 죽어도 일본의 당나라 유학승들은 전통 신라명신에 화신된 장보고를 신라명신으로 숭배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래토템숭배시대는 '용왕=장보고'의 죽음과 함께 불교문화에 의하여 쇠퇴해갔다. 거타지 신화에서는 용왕을 죽이려 한 불교적인 요괴를 "중으로 변신한 늙은 여우"라고 표현하고 있다.
 

 
거타지 신화에서 용왕을 죽이려는 늙은 여우(중으로 둔갑한)를 죽여 용왕가족을 살렸을 때 용왕이 그의 딸을 꽃가지로 둔갑시켜 거타지의 가슴에 품게 하여 당나라 사신단으로 갔다 와서 다시 꽃가지를 여인으로 둔갑시켜 함께 살게 했다. 용왕의 후계자로서 거타지에게 꽃을 바친다는 의미가 거타지 신화 속에 숨어 있다.
 

 
이것은 거타지가 용왕을 계승했다는 의미가 되어 장보고가 해신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 수로부인편에 나오는 '소 모는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는 내용과 여기 용왕이 거타지에게 꽃을 가슴에 품게 하는 것과 구도가 일치한다. 다시 <삼국유사> 어산불영편에서는 "'소 모는 노인'이 용이 되어 부처에게 꽃을 사서 바쳤다"고 하여 결국 중으로 둔갑했다는 '늙은 여우'에게 용왕(소 모는 노인)은 굴복되었다는 것으로 묘사하여 불교문화가 최종적으로 신라 전통의 '神國의 道'를 장악 흡수했다는 것으로 묘사했다.
 
 
중국과 일본에서 '新羅神'으로 숭배되어 온 신라인 장보고

고려시조 신화에 장보고 '해신' 신화가 작제건신화로 나타나는 것은 그저 단순한 이미지 차용이 아니라 험난한 바다 항해에서 자연적으로 위대한 바다의 영웅을 신으로 받든 그 시대의 항해 신앙을 바탕한 것이며, 특히 억울하게 죽은 영웅의 후속적인 신격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바다에서 신룡이 되었다는 문무왕처럼 장보고는 '해신이 되었다'고 믿어졌으며 신라신으로 해상무역인들에게 특히 받들어져 중국 산동반도 적산원 안내문에도 나오듯이 장보고는 동아시아에서 페르시아와 아라비아의 중동까지 그의 이름은 해신 숭배와 함께 뻗어간 것이다.
 

 
신라신이 바다를 통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해신이며 태양신으로 숭배된 것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비롯하여 스미요시 신에서도 볼 수 있는 바다를 건너온 신라신의 전통은 일본에서 이어져 왔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에서도 동신(東神)의 이름으로 숭상되고 있었음을 김부식이 송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의 기록으로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장보고의 적산선원이 있던 산동반도 석도(石岛)의 적산(赤山)은 을 중국인들이 “东方神山(동방신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대로 "东方神山=东神"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라의 태양신인 선도성모의 다른 명칭인 동신(东神)성모를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장보고가 해신으로 받들어진 것은 고래들의 왕인 범고래 해신으로 숭상된 것이며 동시에 신라시대의 산신인 범과 해신인 범고래의 신으로 숭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장보고의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樊川文集>과 그 책을 인용한 <新唐書> 및 <三國史記>는 모두 장보고를 '新羅人'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장보고가 당나라 출생은 아니라는 것은 장보고와 그의 동료 정년(鄭年)이 신라(新羅)로 돌아간 것을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 것을 보면 신라태생임이 틀림없다.
 

 
신라시대 항해자들이 가는 곳마다 장보고의 영향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서해안에서도 해신으로서 장보고의 신앙적인 영향은 찾을 수가 있다. 장보고를 완도(莞島) 출생이라거나 변산반도 출생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배경을 인지하지 못하는 오류이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것만으로 장보고가 청해진 출생으로 보려는 것도 억지로 보인다. 청해진이 완도에 설치된 것은 서라벌에서 당나라로 가는 길목인 완도 지역에 해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신라 조정에 의하여 장보고를 그곳에 배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거타지 신화에서 잘 대변하고 있다.
 

 
신라인 장보고는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지금도 해신으로서 숭상되는 것으로 알져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중국제일해신(中国第一海神)'으로 추앙하고 있을 정도다.
 
 
 
산동반도 석도(石岛)의 적산(赤山)은 “东方神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장보고가 한민족의 영웅이라고 중국인들은 자랑스럽게 평가하고 있다. 중국에서 장보고가 세운 산동반도 적산법화원(赤山法华院)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홍보하고 있다.
 

 
 
 
*사진의 왼쪽이 적산선원 즉 츠산찬위안(赤山禪院)이고, 오른쪽이 적산법화원 즉 츠산파화위안(赤山法華院)이다
 
 

 
당나라 목종 4년(824년) 한민족 영웅인 해상무역가 장보고는 이곳(적산)에 적산법화원(赤山法华院)을 세웠다. 나중에 일본 고승 엔닌법사가 세번이나 적산을 찾았는데 2년 9개월간 이곳에서 묵었다. 그의 저서《入唐求法巡礼行记》는 당나라 때 현장(玄奘) 법사의 손오공으로 유명한《大唐西域记》와 원나라 때의 이탈리아인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대여행기로 유명하다. 일본 사절을 따라 당나라에 유학을 와서 불교의 명승지를 돌아본 엔닌(圆仁)이 이곳에 찾아와 장보고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산원은 한중일 삼국 국민의 우호왕래의 역사적 현장이 되고 있다.
 

 
唐穆宗四年(公元八二四年),韩民族英雄、海上贸易家张保皋在此建“赤山法华院”,后日本高僧圆仁法师曾三赴赤山,客居此院两年九个月,著写的被誉为东方三大旅行记之一的《入唐求法巡礼行记》(日本圆仁所写的《入唐求法巡礼行记》和唐代玄奘写的《大唐西域记》、元朝意大利人马可·波罗写的《马可·波罗行记》被人们誉为“东方三大旅行记”),遂使此地成为佛教胜地和中韩日三国人民友好往来的历史见证地。
 

 
당나라때의 불교사찰인 웨이하이 지역의 적산법화원(赤山法华院)은 세계유일의 불교문화와 현대과학기술의 완전한 결합을 이루는 관음보살계의 태양신(大明圣境)인 '중국제일해신상 - 적산명신(中国第一海神像--赤山明神)이 있다. 이것은 동쪽나라들과 교류해온 역사변천의 일과 중국북방의 어민들의 민속박물관인 '영성박물관(荣成民俗馆)'으로서 한국민족영웅(韩国民族英雄)을 기술하고 해상무역인 장보고의 위대한 생애와 그 기념관의 의미를 가진다.
 

 
威海最古老的唐代佛教寺庙--赤山法华院;世界唯一的佛教文化与现代科技完美结合的观音动感音乐喷泉--极乐菩萨界;中国第一海神像--赤山明神(大明圣境);反映胶东历史变迁事象与中国北方渔业民俗的博物馆--荣成民俗馆;记述韩国民族英雄、海上贸易家张保皋生平壮举的张保皋传记馆
 

 
여기에서 중국인들은 한국민족영웅(韩国民族英雄)인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赤山法华院)은 장보고를 신라명신을 모신 것으로 인정하고 그 신상을 세워 '중국제일해신상-적산명신상(中国第一海神像--赤山明神)'으로 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赤山明神'이라 함은 산동반도에 있는 장보고의 적산선원의 적산(赤山)에 있는 新羅明神(신라명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위치를 앞에 표시하여 신라명신을 표기하는 말이다. 일본에서도 신라명신을 그대로 쓰는 곳과 장보고의 적산원 명신을 모시는 의미로 '赤山明神'이라고 하거나 그 지방의 이름을 넣어 'ㅇㅇ明神'으로 표현한다.
 

 
중국은 당나라의 권위를 세우고, 한국은 신라의 장보고의 위대함을, 일본은 엔닌의 여행기를 자랑하는 그 중심이 산동반도 장보고가 세운 적산법화원으로 홍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도 그렇게 신라명신상을 '중국제일해신상(中国第一海神像)'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일본인들 또한 장보고의 화신으로서 신라명신을 숭배하는 일본의 적산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赤山明神像과 赤山明神的传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적산명신을 소개하고 있다. (*아래의 번역은 http://www.furuze.com/a/shidaofengjing/2010/1102/109.html 웹사이트의 홍보 내용을 필자가 번역한 것이다.)
 

 
"적산명신상(赤山明神像)은 세계 최대의 청동신상이며 높이 58.8m로 '중국제일해신상-적산명신(中国第一海神)'으로 배산임수의 위치에서 사방을 보우하고 있다.석도만(石岛湾) 서쪽 산에 위치하여 우리 지방의 석도봉황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인 적산(赤山) 위에 거석상을 세운 것이다."
 

 
赤山明神像是世界最大的锻铜神像、高58.8米,也是中国第一海神像赤山明神,踞山面海,护佑四方。在石岛湾西山,离我们的小区 石岛凤凰湖 不远处的赤山上有几块巨石.
 

 
이곳 동리의 전설에 따르면 적산신(赤山神)이라고 하는 산신이 있었다. 전설에 전해오는 적산신은 신통함이 대단하여 사람들이 몰려와 해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멀리로부터 사람들이 찾아와 향을 올리고 참배를 하여 재난을 막고 병치유와 복과 평안을 빌었다.
 

 
传说在洞里居住着一个山神,叫做赤山神。传说赤山神神通广大,得到人们的崇信,逢年过节,周围几十里的人都来烧香跪拜,祈求消灾祛病,赐福保平安。
 

 
적산신(赤山神)은 명신(明神)이라고도 하는데 명신은 본래 적산 홍문동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적산명신은 사해를 보호하는 신으로 그 법력이 무한하여 향토를 수호하고 복을 크게 내리며 공덕이 무량하여 황하북방을 보우하는 신이었다.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할 때(BC 219), 동쪽으로 순회하면서 장생불노약을 구하기 위하여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큰 병을 얻어 이곳 명신明神)에게 기원하여 낫았다.
 

 
赤山神,也叫明神,相传明神本相出于赤山红门洞。赤山明神威镇四海,法力无边,守护乡土,福佑大千,功德无量,乃华夏北方庇佑之神。始皇并六国,于嬴政二十八年(前二一九年)东巡成山,以求长生不老之药。途大病,李斯遽祈明神,旋无恙。
 

 
여기에서 중국인들은 적산명신이 장보고에 의하여 신라명신이 된 것에 대하여 중국 배경의 토속신을 가미시키고 싶어한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웅신으로서 장보고가 신라명신을 받들던 신라신이 적산명신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아래에 이어 설명하고 있다.
 

 
당나라 문종 3년(838년) 일본의 천태종 자각대사(慈觉大师)인 엔닌(圆仁)이 당나라로 오는 사절단을 따라 유학와서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세 번이나 적산원에 참배하고 머물렀다. 엔닌이 귀국하던 도중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명신(明神)이 현신하여 위험에서 건져주게 되어서 그때 가지고 가던 경전 수백 권을 보존할 수 있게 했다.
 

 
唐文宗开成三年(八三八年),东瀛天台宗三世座主圆仁(慈觉大师)随遣唐使赴唐求法数载,曾三赴赤山拜谒。归途中,于沧海屡遭劫难,幸明神显灵,方化险为夷,且保全经典数百卷。
 

 
엔닌은 귀국하여 적산명신을 일본의 천태종의 수호신으로 모시게 되어 그후 그곳의 안혜병(安惠秉)이 그 유지를 받들어 교토에 절을 세워 그 이름을 '적산선원(赤山禅院)'이라 칭했다.그후 적산명신(赤山明神)은 점차 일본에서 전국적으로 숭배하게 되었으며, 그 신은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등지에도 퍼져갔다. 지금 일본과 한국 등의 사원에는 적산명신을 받들어 모시고 있으며 세상의 중생들을 위하여 복을 비는 신으로 모시고 있다.
 

 
圆仁归国,遂以赤山明神为天台宗庇佑之神供奉,其后同门安惠秉承其遗愿,于京都修一寺院,名之曰:“赤山禅院”。而后,赤山明神渐为东瀛等国所崇拜,乃至波斯、大食等区域。至今,日本、韩国等寺院仍多供奉赤山明神,以福佑天下,普渡苍生。
 

 
당 고종 5년, 당나라 조정에서 신라를 도와 같은 한국 역사의 고구려와 백제를 무찔러 삼국통일을 완성했는데 이때부터 당나라와 신라는 크게 우호 관계를 긴밀하게 가졌다. 그로 인하여 수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를 방문하여 당나라의 문화와 관제 및 생활을 공부하기 위하여 힘써 군사를 후원하고 배와 노비 등이 장기적으로 중국에 거주하게 되어 동남쪽 연안 바다와 대운해(大运海) 연안지역에 분포하여 거주하게 되었다.
 
 
唐高宗显庆五年,唐政府帮助新罗,也就是现在的韩国打败高丽和百济,统一了朝鲜,从此大唐和新罗非常友好,关系密切。很多新罗人来到唐朝,学习文化、做官、做生意、出苦力、当后兵、当船工、当奴婢,有的长期居住在中国,主要分布在东南沿海和大运海沿岸地区。
 

 
 
 
*장보고가 세운 산동반도 적산원에 세워진 "중국제일해신상(中国第一海神像)"
 
장보고 해신을 의미한다.
 
http://citylife.house.sina.com.cn/detail.php?gid=33375
 

 
 
 
 
*중국 산동반도 적산의 장보고 기념관
 

 
특별히 신라는 당나라와 바다와 연하여 서로 200해리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있어서 해상교통이 적산포(현재의 石岛湾)를 중심하고 자주 교류가 이루어져 그곳에 거주하는 신라인들은 아주 많아지게 되었다. 신라인들이 관리하는 적산법화원에서 법화경을 강론할 때 "사방으로부터 수많은 승려들과 사람들이 몰려와 강론을 듣는 모든 노소 존비 할것없이 모두 신라인들이었다"라고 엔닌의 <入唐求法巡礼行>에서 쓰고 있다.
 

 
特别是和新罗仅一海相隔,相距不足200海里的海上交通枢纽赤山浦(石岛湾),居住的新罗人就更多了。法华院宣讲法华经时,“四方众僧及有缘施主都来会听,道俗老少尊卑都是新罗人(见《圆仁入唐求法巡礼行记》一书)。
 

 
"신라인을 관리하기 위하여 그곳에 특히 신라소(新罗所)를 설치했다". 신라인들은 적산법화원의 불주(佛主)를 제거하고 그 밖에 보우하는 신에게 기원했는데 그들은 홍문(红门)에서 적산신(赤山神)을 참배하여 복과 평안을 내려주기를 기원했다. 더구나 적산법화원을 걸립하기 전에 있던 그곳을 재정비한 후에 적산신(赤山神)에게 주요 참배를 하였다.
 

 
”为了对新罗人进行管理,特设勾当新罗所”。新罗人除去赤山法华院参拜佛主,祈求保佑外,他们也去红门参拜赤山神,祈求赐福保平安,尤其在赤山法华院建立之前和拆毁之后,主要参拜的是赤山神。
 

 
신라에서 시작되었으나 적산신(赤山神)은 나라를 떠나와도 그 은혜를 베풀어주어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신으로 받들어 수호신으로 삼아 그 칭호가 '신라신(新罗神)'이 되었다.
 

 
赤山神也就不分国界施恩于新罗,因此新罗人就把它当成自己的神,当作自己的保护神,称之为“新罗神”。
 

 
대한민국문화부와 해운항만청, 전라남도, 한국문화에술진흥원 편저, <장보고>에 따르면 "일본 큐슈의 하카타 다이자이부 사서에 기록되기를 '엔닌(圆仁)의 제자인 안조(按照) 종사(宗师)가 그 뜻을 이어 히에이산 인근에 온죠지(围城寺)와 미이데라(三井寺) 등의 사찰이 있는 곳에 적산선원(赤山禅院)을 건립하여 신라국의 '大明神' 등에 관하여 기록하고 받들어 모셨다. 그 내용은 오류가 없이 명확히 설명하기를 장보고는 일본의 히에이산 적산선원에 모신 '적산신'으로서 자신을 위한 신인 '新罗神'으로 모셨다고 했다.
 

 
大韩民国文化部、海运航海厅、全罗南道、韩国文化艺术振兴院编著《张保皋》一书中说:“有关日本九州博多太宰府的史书记载,圆仁弟子按照宗师的遗愿,建立的比睿山赤山禅院里绘制的‘新罗神’及邻近寺刹(例:围城寺和三井寺)里供奉的新罗国的‘大明神’等有关记载,都明白无误地说明了张保皋人把日本比睿山赤山禅院里供奉的‘赤山神’当着自己的神‘新罗神’了。”
 

 
그러한 설명에는 "하카타 다이자이부 관청 지역에 상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라인들로서 무역업무에 종사하는사람들이었는데 그 이전에 큐슈일대에 신라인들이 살아왔던 곳이라서 그렇게 신라인 무역업 종사인들이 많았다.
 

 
该书还说:“在博多太宰府内,常驻有许多从事贸易业务的新罗人,而在此之前,就定居在九州一带的新罗人,也多从事贸易业。
 

 
장보고(张保皋)는 일본에 영향을 주어 그후 날이 갈수록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다. 적산선원(赤山禅院)은 히에이산 주변의 사찰들에서 공양을 올리는 신상으로 정착하여 재물을 보호하고 운송과 항해 안전을 보호하는 '新罗神(赤山神)'으로 모셨다. 말하자면 신라인 장보고의 국제무역선단의 수호신으로서 '적산신(赤山神)'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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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保皋对日本的影响,在其后日益明显。如前述的赤山禅院比睿山周围的寺刹里,供奉的象征着保护财富、带来运气,保护航海安全的“新罗神”(赤山神),说明新罗人以及张保皋所组织的国际贸易船队,是把“赤山神”当作自己保护神了。
 

 
당문종 4년(839년) 당나라에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온 일본의 고승 엔닌(圆仁)이 두번(세 번의 잘못. 역자 주)에 걸처 적산법화원(赤山法华院)과 적산촌을 들러 모두 9개월을 머물렀다. 채류하는 기간 엔닌화상은 적산신(赤山神)을 여러번 참배했고 귀국하기 전 다시 적산신(赤山神)에게 참배하여 특별히 배가 순항하여 평안한 항해가 되도록 기원했다.
 

 
唐文宗开成四年(839年),入唐巡礼求法的日本高僧圆仁两次辗转来到赤山法华院和赤山村,住留约有两年九个月。在住留期间,圆仁和尚曾多次参拜赤山神,在回国前又特意参拜赤山神,祈求一帆风顺保平安。
 

 
귀국하는 해상의 항해 중에 갑자기 폭풍을 만났는데 아주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되어 엔닌화상은 적산신(赤山神)에게 절을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때 홀연히 적산신赤山神)이 돛대 위에 나타나 한 개의 흰 깃털을 공중으로 던져 올려 안개를 걷어버려고 바람이 고요하게 되어 그들은 평안하게 일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在回国海上航行中突遇风暴,处境十分凶险,圆仁和尚遥拜赤山,虔诚祈祷,据说忽见赤山神出现在桅杆上,向空中射出一支白翎箭,顿时云开雾散,风平浪静,他们平安回到日本国。
 

 
엔닌화상은 귀국후에 자각대사(慈觉大师)에 봉해졌다. 엔닌은 당나라에 순례하여 구법한 내용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어서 적산신(赤山神)의 보호하심에 대하여 그는 무한한 감격과 숭경의 마음을 적산신(赤山神)에게 바쳐 특별히 적산신상(赤山神像)을 만들어 교토의 천황이 거하는 곳(皇宫)의 표귀문(表鬼门)에 모시게 되었으니 각계 인사들이 숭경과 참배로 적산신(赤山神)을 공양하였다 (赤山神은 신라인들 즉 지금의 한국인들은 '新罗神'이라고 칭한다).
 

 
圆仁和尚回国后,被封为慈觉大师。圆仁认为入唐巡礼求法所以取得成功,全仗赤山神的保佑,他无限感激和崇敬赤山神,特别塑了赤山神像,供奉在京都御所(即皇宫)的表鬼门,受到各界人士的崇敬和参拜。圆仁和尚圆寂后,他的徒弟安存慧和尚继承他的遗愿,在京都小野山庄创建了赤山禅院,供奉着赤山神(新罗人即今韩国人称之为“新罗神”).
 

 
 
 
*엔닌이 장보고의 당나라 적산원에서 귀국하여 신라명신(적산명신)을 모신 적산궁. 일본
 

 
적산신을 참배하는 사람은 집안에다 장신부(张神符: 장보고 신 부적)를 만들어 집안의 텃신을 모시는 문에 봉하면 전체 집안의 무사평안이 이루어졌으며, 재화가 모이기를 바랄 때 적산신(赤山神)을 참배하면 재원이 갈수록 불어났으며, 아픈사람들은 적산신(赤山神)에 참배하고 적산신(赤山神)의 부적을 몸에 지니면 멀지 않아 치유되었다고 한다
 

 
据说凡参拜赤山神的人,请张神符在家里,封住鬼门,就会保佑全家永享太平;凡想发财致富的人,一经参拜赤山神,财源就会滚滚而来;患病的人,一经参拜赤山神,请道神符带在身上,不久就会不治而愈。
 

 
이러한 이유로 적산선원(赤山禅院)은 지금까지 항상 향불을 올리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적산신(赤山神)에 대한 은혜는 중국, 한국, 일본 삼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재난을 막아주고 병을 치유하며 복과 평안을 내리는 신으로서 삼국의 인민들의 공동보호신이 되어 삼국 인민의 우의의 원천이 되어 오래도록 이어져 오고 있다.
 

 
因此,赤山禅院至今香火还是非常旺盛。 赤山神施恩于中、韩、日三国,为三国人民消灾祛病,赐福保平安,成国三国人民的共同保护神,使三国人民的友谊源远流长。
 
 
 

 
이렇게 볼 때 적산신(赤山神)은 중국인들에게도 일본인들에게도 받들어 모셔진 신라신(新罗神)이었으며 동시에 장보고(張寶高)가 화신되어 장보고(張寶高)는 중국인들에게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역사적인 '海神' 그 자체로서 '新羅神' 또는 '新羅大明神'과 동격의 신으로 모셔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중국인들에게나 일본인들에게 장보고만큼 국제적으로 숭앙받는 인물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장보고(張寶高)의 이러한 해상활동을 통하여 바다에서 풍랑을 잠재우는 '海神'으로서 '新羅神'으로까지 숭앙받은 그 배경을 선사시대 이래 코리안 조상들의 고래토템숭배와 함께 이어져 온 바다의 항해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삼국사기>에서 바다와 관련하여 "장보고(弓福)는 海島人이라(弓福 海島人也)고 기록된 사실은 주목된다.
 

 

 
4. 고래잡이 항해인의 '海渡人' 전통 이어받은 '長寶高'의 글자 뜻
 

 
장보고가 '신라신'으로 그리고 '해신'으로 숭앙된데는 단순한 뱃사람의 배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인들이 선사시대 때부터 이어내려온 항해의 달인으로서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었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필히 석탈해처럼 바다를 건너왔다는 의미인 '해도인(海渡人)'으로서 알라스카나 캄차카반도 지역에서 내려온 고래잡이 뱃사람의 후예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몇가지로 추정이 가능하다. 장보고는 항해술이 뛰어난 것은 뱃사람 후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장보고가 활의 명수라는 것도 바다 사람들의 가문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다사냥에서 가장 중요한 솜씨는 활쏘기이다. 해적을 만나도 배가 접근하기 전에 활을 쏘아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고래잡이 후예일 수가 있다는 것은 고래를 작살로도 잡지만 작살 사용 전후에 활을 사용하는 필수 무기이기 때문이다.
 

 
장보고를 '해도인(海島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海渡人' 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바다 섬사람이라는 의미인 '海島人'은 같은 음운으로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海渡人'의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장보고가 단순히 섬사람이 아니라 당나라를 왕래하는 바다를 건너는 해상인이기 때문이다.
 

 
바다를 건너 당나라를 왕래한 '海渡人' 장보고에 대한 칭호는 일본에서 한반도에서 건너온 신화적인 인물들을 '도래인(渡來人)'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장보고는 신라의 석탈해와 같은 '해도인(海渡人)'으로 먼 바다를 오가는 뱃사람으로서 가장 강력한 고래잡이 항해자들의 후예라면 동해 연안을 따라 올라간 캄차카반도 또는 알라스카를 오간 코리안 고래잡이들의 후예일 수가 있는 것이다. 석탈해가 신라로 찾아오기 전의 나라는 "왜국 동북 1천리의 용성국(龍城國)"이라고 한 것도 모두 고래=龍 토템의 배경으로 읽을 수가 있다.
 

 
작제건 신화 그리고 거타지(居陀知) 신화 구조와 거의 같은 생애의 구조를 가지는 장보고 일생은 "왜국 동북 1천리의 龍城國에서 왔다"고 기록된 석탈해만큼 '해도인(海渡人)'으로서 고래잡이 가문의 후예일 수가 있다. 작제건과 거타지는 모두 바다의 '용'과 싸우는 인물로 활을 사용한다.
 

 
근세 이전까지 서양의 고래잡이배들의 그림을 보면 고래가 숨쉴 때 뿜어 올리는 두 물줄기를 그린 바다의 괴수들과 싸우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면 작제건과 서타지 신화의 '용과 싸우는' 내용에 일치한다. 바다에서 '龍'과의 싸움이란 바다의 고래 특히 고래를 공격하는 범고래나 상어와의 싸움을 의미할 수 있다.
 

 
해상왕 장보고가 활을 잘 쏘는 것은 작제건과 거타지의 배경과 일치하는 많은 점에서 미루어볼 때 고래잡이 후예라는 것이 필자의 추단이다.
 

 
장보고를 직접 만나본 엔닌의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록에서 '長寶高'라고 기록한 그 글자 뜻도 어딘가 고래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바다에서 용왕(범고래)에 관하여 표현할 때 '칠보(七寶)'가 용왕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용왕에 대한 이야기에서 '寶'라는 글자가 자주 들어간다. '長寶高'란 길고 높다는 의미에서 바다의 고래 이미지가 있는 것이다.
 

 
배를 만들 때에 배의 바닥에 길게 깔아 배의 '통뼈'의 역할을 하는 배 대들보를 '용골(龍骨)'이라고 한다. 원시 고래잡이들은 고래잡이 배의 대들보를 고래뼈로 만들었다는 것을 세계의 원시 고래잡이 문화 전통에서 볼 수 있다. 고래뼈가 튼튼하고 길기도 하지만, 바다에서는 고래가 오래 살고 다른 바다 짐승들을 막아낸다고 보았기 때문에 '長寶高'는 그런 용골(龍骨) 즉 고래뼈(鯨骨)의 길고 높은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에서 '용가리 통뼈'라는 말이 있다. '용가리'란 '고래 종류'라는 뜻이며 '통뼈'는 고래의 강하고 큰 뼈라는 의미이다. '용가리 통뼈'란 長寶高의 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장수를 장골(長骨)이라고 표현하거나 기골(肌骨)이 장대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모두 고래토템 숭배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대로 알라스카 원주민들은 집을 지을 때도 고래뼈로 대들보와 서까래를 만들었다. 우리말 대들보의 '보'도 고래를 의미하는 寶(보)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삼국유사>에서 여러 차례 기록하고 있는대로 용궁 및 용왕에 관련한 '七寶宮殿'이란 본래 고래뼈에서 나오는 일곱가지 중요한 보물이었을 수가 있다. 고래에게서 나오는 '七寶'란 집이나 배 그리고 배의 노를 만들 수 있는 튼튼한 척추뼈와 갈비뼈를 비롯하여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견갑골과 고래이빨 그리고 외뿔고래의 뿔에 더하여 나중에 '고래눈'과 고래기름이 포함되어 '七寶'라고 했을 것이다.
 

 
고래등같은 기와지붕 = 七寶宮殿
 
七寶: 1.고래 척추뼈, 2.갈비뼈, 3.견갑골, 4.고래이빨,
 
5.외뿔고래 외뿔, 6.고래눈, 7.고래기름
 

 

 
흔히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란 알라스카인들처럼 고래척추와 갈비뼈로 짓는 집을 '七寶宮殿'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말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라는 말은 고래척추와 갈비뼈로 만들던 대들보와 서까래가 보이는 기와집을 의미하는 '七寶宮殿'의 뜻이 있는 것이다. 고래눈은 밤에 방안에 두면 밝게 보인다는 옛 기록이 있다.
 

 
이러한 면에서 거타지신화와 작제건 신화가 고래(용왕)와 관련된 신화로서 장보고 스토리와 일치하는 여러가지 면에서 '長寶高'는 고래 척추뼈와 같은 길고 높은 대들보와 같은 '寶'의 長寶高로서 '七寶宮殿'의 의미가 있으며, 그런 이름을 가진 長寶高는 고래잡이 후예라는 필자의 주장은 충분한 타당성을 지니는 배경을 가지는 것이다.
 

 

 
5. 장보고(長寶高)와 신라인들의 '고래장' 이미지의 운주사(雲住寺)
 

 
 
전남 화순 운주사(雲住寺)가 장보고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면, 장보고의 생애가 미친 내용이 운주사가 비밀에 쌓이게 된 이유일 수가 있다. 장보고가 신라 왕실에 쿠데타를 일으켰던 인물로서 세력이 강하여 신라 조정에서 암살시킨 인물로서 해신으로 숭앙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나말려초의 불교세력과 종교적으로 일면 대치된 인물이 장보고였기 때문에 그를 해신으로 모신 운주사가 미스터리로 남은 역사적 배경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국교인 불교와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그늘 아래 운주사(雲住寺)가 지니는 신라 토속 전통인 용왕=고래토템문화가 빛을 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장보고는 부처가 아닌 바다 항해를 위한 신라명신(新羅明神) 즉 해신(고래신)으로 숭배되었기 때문에 배에 실어 가호를 빌었던 그 신상들을 모아둔 곳이 운주사(雲住寺)였을 개연성이 있다. 그렇기에 불교를 강화한 고려시대에 들어와 운주사는 더욱 경계의 대상이 되고 철저히 고래토템숭배의 잔재로서 운주사(雲住寺)는 배제되었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운주사(雲住寺)에 '천불천탑'으로 알려진 석조신상들이나 특별한 장례 의미를 지니는 돌탑들은 '미륵불'이라는 이름으로 해신 신앙의 잔재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장보고시대의 해신 석조신상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불교 이전 신라명신 숭배문화를 위장하기 위한 인위적인 불상 미륵불들을 그곳에 추가 배치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운주사(雲住寺)의 고래토템=용왕숭배의 무속적인 기를 누르기 위하여 고려시대 불교세력에 의하여 그곳에 대웅전을 나중에 세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운주사(雲住寺)에 남아 있는 수많은 천불천탑의 비불교적인 유물들에 대한 그 의미를 희석시키기 위하여 불교와 음양풍수신선도의 습합된 지도자로서 고려시대 초기의 도선국사 전설이 곁들여지게 되었을 것이다.
 

 
운주사는 배를 운행하는 해신 즉 고래신을 모시는 사당이라는 면에서 본래는 사찰 이름이 아닌 사당 이름으로서 운주사(運舟祠)였을 수가 있다. 일본에 남아 있는 장보고 해신=신라명신(新羅明神)을 모신 사당에서 볼 수 있듯이 바다의 해신을 모신 곳이 운주사(雲住寺)라고 추정이 되는 것이다.
 


 
 

 
다만 장보고를 기리는 상징으로 고래신으로서 장보고 혼을 운주사에 모시게 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이 장보고신을 '신라명신'의 이름으로 장보고 신위를 모신 사당을 짓고 지금까지 모셔오고 있는 곳이 수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海神'으로서 추앙받은 장보고이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없이 그의 혼을 '바다에 수장시키는 장례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그곳 운주사(雲住寺)가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바다에 수장되면서부터 장보고는 무속적으로 해신으로 항해자들에게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일본과 당나라 적산원으로 오가던 상인들이나 관선 항해자들에게도 해신으로 숭상되었을 것이다. 영웅적인 인간이 신격화되어 숭배되는 것은 오늘날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등에서 잘 남아 있다.
 

 
해신이 된 그런 장보고 신을 모시기 위하여 바이킹 추장의 바다 수장만큼이나 웅장하고 거룩한 의식을 사당 조성으로 대신하되 바다의 배에 장보고 해신을 장례치르는 의식으로 운주사가 배치되고 조성되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운주사는 바다 '海神'으로서 다시 장보고와 같은 위대한 영웅으로 환생하도록 기원한 '고래장'이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 '고래장'이란 '횡혈식 고분'이라는 우리말이다. 고래가 죽으면 바닷가 물 밑 동굴 안에 거한다고 믿었던 것을 남태평양 원시고래잡이 문화에서 볼 수 있다. 감은사 마루바닥 밑으로 "용이 들어오도록 물길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러한 바닷가 물밑 고래신이 거하는 곳의 의미를 살린 것으로서 사찰의 용구(龍溝)에 대한 필자의 해석이다. 이러한 용구(龍溝)는 본래 고래신이 들어오는 경구(鯨溝)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용토템은 고래토템에서 불교적 그리고 당나라 영향이래 점차 변이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아마존강을 따라 돌고래가 들어오고 있듯이 울산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태화강 안쪽까지 바다물이 들어왔던 때가 있었다고 하니 수천년 전 고래암각화를 그곳 암벽에 새겼을 때는 고래들이 '경구(鯨溝)'를 따라 들어온 것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고래장은 바닷가의 물 밑 동굴에 고래귀신이 거한다고 믿은데서 비롯된 것이 육지의 횡혈식고분 즉 '고래장'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래장은 고려시대를 의미하는 '고려장'이 아니다. 횡혈식 고분은 청동기시대 이전에도 존재했던 원시 고래토템숭배에서 비롯된 고래뱃속에 들어가 다시 환생한다는 고래잡이 전통장례에서 기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운주사(雲住寺)는 상여행렬이면서 '고래장'의 의미가 있는 곳이라고 하겠다. 운주사 골짜기를 보면 거대한 고래가 들어오는 바닷가 물 밑 고래 동굴 즉 경구(鯨溝)의 이미지가 있다.
 

 
용이 들어오는 용구(龍溝)가 있는 신라 황룡사와 백제 미륵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왕사이다. 대왕고래와 대왕임금의 신화적인 연결을 알리기 위함이다. 이것이 고구려 사찰과 다른 백제와 신라의 대표적인 미륵사와 황룡사의 특징이다. 용과 미륵이 본래는 고래토템숭배에서 비롯했다는 증거가 용구(龍溝)에서 볼 수 있다.
 

 
현재의 운주사(雲住寺) 대웅전 뒤편 명당터에 묘를 쓰면 "칠산(七山) 바다에 도읍을 세우는 '범씨 세상'이 온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이것은 바다의 항해와 관련이 있는 해신을 모신 사당으로서 운주사(雲住寺)의 전신이 그곳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七山(칠산) 바다'란 용왕(고래토템신)의 상징인 '七寶'를 말하며 寶는 고래를 의미하기 때문에 바다의 산과 같은 고래 바위산이 된 일곱마리 고래의 세상이라는 고래가문의 바다에 범고래의 세상이 온다는 것을 운주사 전설에서 볼 수 있다.
 

 
처용신화에서 처용이 "동해 용왕의 일곱아들 중에 막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 일곱마리 고래를 의미하는 '七寶' 중의 막내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동해바다에 들어간 수로부인은 '七寶궁전'을 다녀왔다고 한 것은 일곱마리 고래 새끼가 있는 용왕의 용궁에 다녀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코리안 신대륙발견>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의 비밀: 신라 왕실의 대왕고래토템 계승에서 다루었지만, 조선시대 왕실 어좌 뒤에 세우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는 다섯마리 고래가문 앞에 왕과 왕비의 고래부부를 합친 '七寶'의 의미가 있다.
 

 
일월오악도는 바다를 중심하고 그려지는 다섯 봉우리의 '고래떼'를 의미한다. '七山바다'란 오악 봉우리와 왕과 왕비가 바다의 고래대왕으로 숭배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조선왕조까지 조공을 바치고 문화도 유사한 바다의 왕국 오키나와의 유구국에는 '엄마'를 '엄마'라고 부른다.
 

 
그곳 유구국 왕들도 조선왕조처럼 일월오악도가 있다는 것은 "칠산(七山) 바다에 도읍을 세우는 '범씨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옛 사람들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동해안의 고래토템은 신라를 중심으로 오키나와까지 내려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코리안 신대륙발견> 시리즈 글에서 논했지만, 멀리 인도네시아 라마렐라 고래잡이들이나 뉴질랜드 마오리족 고래잡이들의 기원이 동지나해인 오키나와 인근 및 타이완 지역의 바다사람들이었다는 학설은 그래서 선사시대 코리안 고래잡이들의 항해에서 그 원천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3. 신라신 장보고(長寶高)의 영웅담을 베낀 고려시조 신화의 작위성
 

 
장보고의 신화적인 숭배는 밖으로는 중국과 일본 안으로는 신라의 거타지 신화에서 고려왕조 개창신화인 작제건 신화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앞서 논했다.
 

 
작제건 신화는 고려왕조의 건국신화에서 고려시조 왕건의 조상이 위대한 바다의 영웅이라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 더더욱 당나라와 관련된 의미를 강조하려 했다. 그 배경을 당나라에서 활약하고 바다에서 영웅적인 숭앙을 받은 장보고의 생애에 연관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통일신라를 복속시켜 고려왕조가 정통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서였다. 특히 신라 왕실에 쿠데타로 저항하다 암살당한 장보고를 고려왕조의 정통성에 이어졌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신라왕조에 대한 고려왕조의 차별성과 혁명성을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역사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라의 진평왕의 옥대를 경순왕이 고려태조에게 바쳤다고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신라왕조의 종교정신을 고려왕실이 계승한다는 면이 있다. 그것은 신라왕조의 수치가 아니라 고려왕조가 신라왕조를 계승한다는 신라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신라왕손이라고 선전했듯이 난데없는 왕건이 나타나 그 등극을 강조하기 위하여서는 천년왕국 신라왕조의 오랜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해야 하고, 더불어 신라의 해신 장보고의 영웅적인 신화를 고려왕조의 신화적인 뼈대로 삼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려왕조는 한국사의 그 어떤 왕조교체보다도 전대 왕조(신라왕조)의 계승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 전시된 바 있는 북한에 소장된 고려시조 왕건 청동상.
 
고려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 신화는
 
신라의 장보고 영웅담을 신화로 만든 거타지 신화를 재구성한 것이다.
 

 
 
 
*일본에서 장보고의 화현(化現)으로 보는 신라명신좌상(新羅明神坐像)
 
AD 806年 조성. 미에데라(三井寺). 일본 국보
 
고려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 신화의 실제인물이 신라의 장보고 장군이다.
 

 
작제건 신화는 그래서 장보고의 스토리 구조에 고려시조가 당나라 혈통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정치적 프로파겐다용 신화인 것을 알 수 있다. 作帝建(작제건)이라는 이름 자체가 황제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다는 한자로 조합했을 정도이다. 그것은 고려시조 왕건의 한자가 왕이 된다는 의미인 王建이라고 칭한 것과 같은 인위적인 칭호임을 알 수 있다.
 

 
왕건의 성은 왕씨이고 그 할아버지 작제건은 작씨이고 그 선대 시조인 호경은 당나라 피를 이어받은 강씨라는 것은 고려왕조의 배경이 얼마나 작위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건의 시조라는 호경(虎景)은 본래 신라왕실의 고래토템인 범고래를 의미하는 호경(鯱鯨)에서 호경(虎景)으로 산신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려왕조의 신화적인 건국 이미지 메이킹은 조선왕조가 국호 조선을 명나라에서 얻어오고 조선왕조의 먼 기원을 기자조선에 이으려 강조한 것보다 더 혈통적으로 사대주의적으로 조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역사적인 유래가 기자조선이 아닌 것처럼 고려시조의 혈통이 '作帝建'이라는 조작된 이름과 당나라 혈통까지 사칭해야 할만큼 신라왕조 1천년 역사에 대하여 새로운 왕조의 건국을 내세우기에는 고려시조는 너무나 그 신화적인 권위를 신라신화에 기대야 했던 것이다.
 

 
결국 장보고의 영웅적인 스토리를 차용한 거타지 신화를 작제건 신화로 재창출해 낸 결과로 신라 왕실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킨 장보고의 신화를 고려왕조 시조의 신화적인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작위적인 신화 조작은 결과적으로 고려왕조의 정통성이 신라의 역사적인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사실이 이 글을 통하여 드러나게 된 것이다. 신라시대 신화와 장보고 역사는 이렇게 고려왕조의 뼈가 되고 그 신화적인 뿌리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오두 김성규 odunamsan@hanmail.net )

*관련글:
 

 
<코리안 신대륙발견> 운주사(雲住寺)는 신라시대 항해자들의 고래장 상여행렬
 
<역사산책> 운주사(雲住寺) 미륵불들의 줄 문양은 고래에서 유래했을까?
 
<역사산책> '용사일기(龍蛇日記)'로 본 성주(星州)의 역사와 왜인들의 시조신(始祖神)
 
<역사산책> 선덕여왕과 미실(美室)의 여성적 권력 발생의 배경
<스크랩 자료임)




           세기의 대결 한국과 미국
 도둑들-




위선의 얼굴과 한국인이란 무엇일까? ethnos44 2010.02.25 22:128
조회659왜 이 모양일까? 만원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마구 밀어젖히며 남의 발을 밟거나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 도로에서 자동차 시비가 났을 땐 무조건 목소리를 높여 놓고 봐야 한다. 뒤차가 밀리든 말든 알 바 아니다. 사회는 온통 이기는 것만이 중요하다. 가뜩이나 좁은 국토에서 환경오염은 더해 가고, 경제는 불황인데 사람과 부딪치는 게 이렇게 싫을 수가 없다. 정말, 뉴질랜드로 떠나고 싶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일까? 최근 이화여대 한국학과 최준식 교수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사계절)라는 책을 펴냈다. 그리고 한국에서 28년째 주재하고 있는 일본 상사맨 모모세 다타시도 자신의 한국경험을 바탕으로 쓴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 따라잡는 18가지 이유>(사회평론)룰 펴냈는데 둘 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한국인의 자학적 취미 때문이 아니라, 요즘 한국인들이 한국인 스스로의 인성에 대해 느끼는 위기의식 탓일 것이다.
 
 
인성에 대한 위기의식 깊어 간다
 
이들이 지적한 우리의 모습은 한마디로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앞뒤로 흔들리는 빌딩 입구의 두꺼운 유리문을 여닫을 때 누구도 뒷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 나만 지나가면 그만이다. 한국 사람이 '정'이 많다고? 그건 쵸코파이 광고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혹독한 나라는 드물다. 자기 동포인 조선족에게 대량 사기를 치는 사기꾼의 나라를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한 울타리 안 장애인들에겐 또 어떤가? 장애인 교육ㆍ보호시설이 들어올라치면 지역주민들의 결사 항전이 시작된다. 자기 아이들이 '병신'을 보고 크면 안 된다는 교육적 이유와 땅값이 떨어진다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남에 대한 배려가 없기는 바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를 운항하는 여객선 뷔페 식당엔 '한국인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다. 한국인이 왔다 가면 음식은 물론, 소금, 후추에 포크까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못 먹는 사람들, 그건 나와는 상관없다.
 
최 교수는 이런 한국인의 부정적 문화를 분석하는 근거로 네덜란드의 홉스테드(Hofstede. G.)가 쓴 <세계의 문화와 조직>을 인용해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권력의 불평등성을 잘 참아 내며(권위주의), 개인보단 집안이 중요시되는 사회이며,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여성적인 문화를 지녔으며, 자기와 다른 것을 잘 참지 못하는 불확실성 회피의 정도가 높은 나라로 분류됐다. 그 근저에는 집단주의로 발전한 뿌리깊은 가족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다. 농경 사회와 유교 문화 속에서 발달한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이전엔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였으나 산업화 이후 이 가족주의는 흉물스럽게 변했다. 가족, 그리고 한 동네 사람이라는 '우리'라는 집단 안에서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정'으로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원만하게 굴러갔다. 하지만 사업화 이후 집단이 파편화되면서 이웃이 사라지고, 세상살이가 어렵다 보니, 결국 앙상한 '가족 이기주의'만 남게 됐다. 그래서 내편이냐 아니냐를 끊임없이 갈라, "한통속, 한집안끼리 뭉쳐서 우리끼리는 다 봐주고 다른 집단은 타도 혹은 극복의 대상으로 보자"는 집단 이기성을 띠게 된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 문화다.
 
 
배타적 민족주의… 오로지 승리만 집착
 
가족주의는 배타주의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지난해 처음 프로농구가 도입되고, 외국인 용병들이 대거 진출했을 때도 우린 '된장농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며 용병과 한국인 선수들을 철저하게 나눴다. 여기에 세계1위의 고아 수출국, 당연하다. 누구네 씨인지도 모르고 고아를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인 고아 중에서도 장애인이나 정신박약아를 입양하고, 자신들의 자식이 있음에도 외국인 고아들을 입양하지만 한국에선 거의 드문 일이다.
 
이런 순혈 가족주의에선 오로지 다른 가족을 거꾸러뜨리기 위한 경쟁만이 남았다. 아이들 운동회 때 부모들이 아이들과 함께 뛰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승부에 집착, 룰이고 뭐고 없다. 반칙을 해서 친구를 넘어뜨리더라도 이기기만 하면, 부모는 "잘 했다"며 자식 머리를 쓰다듬는다. 입시 경쟁에 돌입하면 친구는 적으로 돌변한다. 이러다 보니 악만 남게 됐다.
 
지난 7월 출간된 최봉영 교수(항공대)의 <한국 문화의 성격>은 이런 한국 문화의 형성 과정을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문화의 잘못된 첫 단추는 구한말 왜곡된 근대 문화의 기형적 이식ㆍ전개부터 연원이 더듬어진다. 연이은 일제 치하에서 사람들은 굴종과 타협을 익히면서 윤리적 극단주의, 자기 비하가 만연했다. 한국전쟁은 또하나의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삶과 죽음 앞에서 극단적 이기성이 정당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 '∼가 밥 먹여 주냐'도 이즈음에 나왔다. 그리고 자유당 독재 시절 권모술수만이 판치면서 정의는 사라졌다. 특히 4ㆍ19의 성과가 군사쿠테타라는 불법 아래 가뭇없이 사라지면서 오직 승리의 결과만이 중요할 뿐이라는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최근 신한국당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후보 교체 논의가 전개되는 것도, '지면 죽는다'는 식의 사활을 건 승리지상주의 탓이다.
 
군사 정권 시대에는 모든 게 '잘 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돈이 곧 善이었다. 천민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형태의 자본주의 문화와 '하면 된다'는 '무데뽀' 군사문화가 우리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목표에 대한 무모한 집착, 권위에 대한 절대복종, 획일적 질서 유지, 이는 한국인의 경제 성장에 나름의 역할을 한 게 사실이나, 그 부정적 유산은 고스란히 남아 이제 우리 차지가 됐다. 80년대 후반 이후 부의 축적이 일반화되면서 개인의 향락적 욕구가 폭발적으로 분출된 것도 부와 함께 쌓아 온 왜곡된 가치관의 결과다. '萬家에 의한 萬家의 투쟁 상태'. 사회적 무질서와 혼란, 그리고 사회적 낭비와 비능률이 계속되면서 경제성장도 한계다. 불황 여파 속에서 재벌들이 수입품에만 열을 올리는 것도 우선 '나만 살고 보자'는 가족주의적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명치유신을 통해 막부의 가신에서 천황의 가신으로 변모했다. 이후 그들은 가신에서 관료와 부르주아로 변신해 신문화를 적극적으로 건설했다. 문화적 격변기에 大和와 천황으로 대표되는 민족의 중심축을 유지하면서 문화의 중심을 中華에서 西歐로 옮겨갔다. 그러나 일본은 가족주의 문화를 국가로 확대시켰을 뿐 다른 나라로 확대하지 못해 결국 일본 이외의 국가를 '남'으로 보아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한국은 그 가족주의 문화를 자신의 가족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했다. 오히려 과거 동리나 한 마을에까지 흘렀던 가족주의가 이젠 가정으로 축소되고, 이상한 형태의 지연, 혈연으로 흘러 버렸다.
 
 
불행한 성장의 유물에 발목 잡힌다
 
최준식 교수는 이에 대해 "가족주의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한 마을에 살 땐 필요 없는 가치관들이 산업 사회가 되면서 생겨났는데 우린 그런 정신적 준비 없이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왕과 같이 전 국민을 하나로 묶는 통합 원리의 부재, 일제 침략에 의한 문화적 단절 등이 한국 문화 부정적 요소의 큰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최 교수는 또 "가족주의를 말살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긍정적 가족주의에 기초해 국민을 통합하고, 자긍심을 심어 주는 르네상스 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고 말했다.
 
한 나라의 국민성은 고정불변도 아니고, 지금의 상태가 불과 1백년 안팎의 결과라고 볼 때 그래도 희망을 가질 여지는 남아 있다. 구한말, 해방 공간, 60∼70년대 산업화 과정 등 우리 역사의 분수령에서 우린 그때마다 惡手를 거듭했다. 산업화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그저 앞만 보고 달렸던 그 과감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기제가 됐다. 역사에선 위기와 기회가 함께 왔다. 그렇게 낙관적이진 않은 것 같다




한국의 타락정치는
정치선동꾼과 양반형(型) 기자들의 합작품(合作品)
趙甲濟 
  
  한국에 기자들은 2만 명을 넘는데 단 한 사람도 시리아 내전(內戰) 현장 취재를 하지 않는다. 일본의 한 여기자는 며칠 전 시리아의 알레포 시가전(市街戰)을 취재하던중 정부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시리아 내전에서 죽은 기자는 20명이다. 한국 기자는 한 사람도 없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을 취재중 죽은 한국 기자도 없다. 외국기자들은 그렇게 많이 죽는데 한국 기자들이 죽지 않은 비결은 무엇인가?
 
  위험한 현장을 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가 목숨을 아끼려고 위험지대를 피하려는 것을 욕할 순 없다. 다만 기자직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위험을 피하는 기자들은 양심이 있다면 부지런하기는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 기자들은 부지런하지도 않다. 부지런한 이들은 정치선동꾼들이다. 이들이 거짓말을 하면 기자들은 무시하지 않고 충직하게 써준다. 기자가 선동꾼의 주장을 검증하기가 귀찮으니 그대로 받아 쓴다. 게으른 기자들이 부지런한 선동꾼들의 대변인으로 전락하였다.
 
  좋은 예가 장준하(張俊河) 추락사건이다. 지난 20년간 수도 없이 우려 먹은 '타살설'을 선동꾼들이 또 다시 들고 나오니 기자들이 또 다시 써준다. 장준하가 타살되었다면 범인은 그와 동행하였던 김용환씨일 수밖에 없는데, 기자들은 김씨에게 전화 한 통 걸지 않고 김씨를 살인범으로 모는 타살설을 받아쓴다. 명예훼손의 공범 역할을 자원한 것이다.
 
  한국의 정치를 황폐화시킨 가장 큰 책임은 정치선동꾼과 게으른 기자들이다.
  절대로 기자직을 맡아선 안 될 이들이 펜대를 잡고서 문법과 헌법과 사실에도 맞지 않는 기사를 써댄다. 이게 정보화 시스템에 의하여 증폭된다. 기술이 거짓말의 확산에 기여한다.
 
  아무리 문명의 利器(이기)라도 양심 없는 권력자들(기자 포함)에게 넘어가면 공동체와 진실을 파괴하는 兇器(흉기)가 된다. 한국의 양반형 기자들의 原型(원형)은 조선조의 선비 정치인들이다.

































미군 병기.2007



 


개미 함정 파기(개미 지옥 만들기, 개미귀신 놀이
http://blog.daum.net/chamdr/7436085

귀여운 아이들 놀이~





 X-Japan - 紅(Kurenai)
 http://tvpot.daum.net/v/j_pXGDpW8dY$

X-Japan - 
                    紅(Kurenai)













                           

    
                                         








명주잠자리
http://tvpot.daum.net/v/vd4b2CLb1yCb1y11VWZ01Z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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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Japan=>Endless rain

 http://tvpot.daum.net/v/DPllU0bGlM8$
엑스 재팬 (X-Japan) 가수
멤버
 
요시키 토시 파타 히스 스기조
활동정보
 
Band (1982년 결성~1997년 해체)
 
활동연대
 
1980년대 ~ 2000년대






X-Japan - Endless Rain







I'm walking in the rain 






行くあてもなく傷ついた身體濡らし 




絡みつく凍りのざわめき 



殺し續けて 彷徨ういつまでも



Until I can forget your love


眠りは麻藥 




途方にくれた心を靜かに溶かす 



舞い上がる愛を 踊らせて



ふるえる身體を 記憶の薔薇につつむ 



I keep my love for you to myself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Days of joy, days of sadness slowly pass me by



As I try to hold you, you are vanishing before me



You're just an illusion When I'm awken, my tears have dried in the sand of sleep



I'm a rose blooming in the desert



It's a dream. I'm in love with you




まどろみ抱きしめて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I awake from my dream I can't find my way without you The dream is over  聲にならない言葉を繰り返しても 




高すぎる灰色の壁は 



過ぎ去った日の思いを夢に寫す 




Until I can forget your love



Endless rain, fall on my heart 心の傷に


 
Let me forget all of the hate, all of the sadness 



Endless rain, let me stay evermore in your heart



Let my heart take in your tears, take in your memories



心の傷に 


마그마-해야/서태지와 아이들-필승
--> http://tvpot.daum.net/v/v-vx5Po2pYs$

서태지 - 교실이데아 (concert)  -서태지 연설-












서태지님 대통령 출마 ~~~~~~~~~~~~~~~~~~~
2012년 서태지대통령당선~
 서태지 - 교실이데아 (concert) -서태지 연설- Boney M(보니엠) - Happy Song(해피송

서태지 - 교실이데아 (concert)  -서태지 연설-
 http://tvpot.daum.net/v/EJaoqZjIDOM$

서태지님 대통령 출마 ~~~~~~~~~~~~~~~~~~~
2012년 서태지대통령당선~






Boney M(보니엠) - Happy Song(해피송
 http://channel.pandora.tv/channel/video.ptv?ch_userid=phs824&prgid=5358792

Boney M(보니엠) - Happy Song(해피송


)
데뷔
1978.00.00|독일
유형
혼성|그룹
연대
1970, 1980, 1990, 2000, 2010
장르

스타일
댄스, 디스코
맴버(Liz Mitchell, 보컬), (Tony Ashcroft, 댄스, 아크로바틱), (Carol Grey, 백보컬), (Patricia Foster, 백보컬)

2012 런던올림픽 마스코트


올림픽 마스코트에 놀란 시민
“50년대 호러 무비에 나오는 주인공도 아니고. 볼 때마다 무섭고 끔찍하다.”
“아이들이 마스코트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괴물이 공격한다고 생각했다고 하더라.”

2012 런던올림픽 개막을 하루 앞둔 영국 런던에선 시민들의 볼멘소리가 쉴새 없이 들려오고 있다. 올림픽의 상징인 ‘마스코트’가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런던시내를 다니며 ‘홍보’를 하자, 기존 마스코트들에 기대하던 반응과는 정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마스코트 탈을 쓴 사람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자 이를 본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거나 도망가기 일쑤였다. 마스코트를 보면 서로 좋다며 쫓아가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사인을 받던 다른 올림픽 때와는 달라도 한 참 다른 모습이다.

‘웬록’이라는 이름의 런던올림픽 공식 마스코트는 그동안 올림픽 마스코트가 사람이나 동물을 형상화해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첨단 기술을 함의하고 있다. 몸체는 올림픽 경기장 소재인 강철에서 영감을 얻었고, 노란 머리는 경기장 지붕 모양을 따왔다. 머리 위 세 개의 봉우리는 금은동 메달을 수여하는 연단을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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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런던올림픽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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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V] Kylie Minogue - Timebo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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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ylie Ann Minogue, Kylie Minogue) 가수, 영화배우
    출생
    1968년 5월 28일 (만 44세), 호주 멜버른

    Kylie Minogue - The Locomotion -1987 Rockpop]

    http://channel.pandora.tv/channel/video.ptv?ch_userid=jun3801&prgid=35489511

    수애-님은 먼곳에 간다고 하지마오

    http://youtu.be/kg58PZy8XbY


    5,6,7,8's. I walk like jayne mansfield and i'm blue



    세상의 미친자들 - 어느 고등학교 교사가 썼다고 전해지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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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미친자들





    세상의 미친 자들에게 붙여지는 이름이 있다.

    현실 부적응자,

    반항아,

    문제아,

    부적합 판정을 받은 자.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자들,

    이들은 규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상 유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의 말을 인용할 수 있고,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들을 칭찬하거나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 할수 없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을 무시하는일.

    왜냐하면 그들은 사물을 바꿔 놓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명하고, 상상하고, 치료한다.

    탐험하고 창조하고,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들은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어쩌면 그들은 미쳐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텅 빈 화폭에서 그림을 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침묵 속에 앉아

    결코 씌어진 적이 없는 노래를 들을 수 있겠는가.

    또는 붉은 행성들을 응시하면서

    우주 정거장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미치광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그들을 천재라 부른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친 사람들만이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  어느 고등학교 교사가 썼다고 전해지는 시

    [스크랩] 빗속의여인 / 신중현 & 김추자



    조용필 한오백년


    'Black Or White' by Michael J..
    http://tvpot.daum.net/v/8X7Lw9qoHIo$



    돌아 가는 삼각지 (배 호)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
    http://www.youtube.com/watch?v=ZQM0TUgMKGY&feature=player_embedded

    JO- 내가 있을께 ( 드라마 종이..
    http://tvpot.daum.net/v/iEyLIKzQhd0$


    Sad Movie

    http://tvpot.daum.net/v/JCiqMjFvEc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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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d Movie - Sue Thompson

     
    Sad Movie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그 어느 날 쓸쓸히 나홀로 갔다네 그이와 나란히 가고 싶었지만약속을 지킬 일이 있다기에나홀로 쓸쓸히 그 곳에 갔었다네밝은 불은 켜지고 뉴스가 끝날 때나는 깜짝 놀라 미칠 것만 같애그이와 나란히 앉은 사람은 언제나 다정하던 나의 친구Oh ~ ~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Oh ~ ~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뚜비 뚜비 뚜비 뚜비 눈물을 흘리며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는 웬일이냐고 물었죠그러나 나의 서글픈 대답은언제나 슬픈 영화는 날 울려줘요Oh ~ ~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Oh ~ ~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뚜비 뚜비 뚜비 뚜비우 우우우우 우 우우우우슬픈 영화는 날 울려줘요 오 ~ ~
    
      
    (1926. 7. 19 ~ ) Sue Thompson이 
    Sad Movies <새드 무비(Sad Movies)>는 
    1960년대 초의 팝송이다
    1961년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라는 
    곡으로
    미국 팝챠트 5위 에 올랐을 때 
    이미 그녀는 36살이나 되는 
    장년 의 나이였다.
    본명이 에바 슈 맥키
    (Eva Sue McKee )로
    1925년 미국 미주리주의 네바다 
    시에서 태어난 Sue Thompson은
     당시 가능성이 없는 한물간 
    가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십대앳된 목소리 를 지녔으며,
     이노래는 당시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곡이다.







    지고이네르 바이젠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http://tvpot.daum.net/v/6zlTproSnYY$


    [스크랩] 전인권-아리랑
    http://tvpot.daum.net/v/GgjpwR1v8BU$


     Donna Summer - Romeo
    1948년 12월 31일(미국) ~ 2012년 5월 17일 (향년 63세)  쥐띠, 염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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